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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관제탑을 벗어난 차영은 새로 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태주의 집에서 내려가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어왔을 때 침대 옆 협탁에 원래 쓰던 휴대폰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양새를 보고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올랐다. 너무 꺼림칙해서 바로 당장 인근 대리점으로 가 새 번호로 개통을 하고 원래의 것은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렸다.
무단으로 결근을 한 셈이니 일단 탑장과 동료들에게 상황 설명을 해야 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이끌고 공항으로 간 그는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휴가를 떠났어야 하는 날짜에 차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적잖게 놀란 얼굴을 했지만 탑장이 무슨 말을 해 두었던 건지 꼬치꼬치 캐물으려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제 안색이 너무 나빠서일 수도 있었다.
휴가계를 전부 반납하고 다시 일에 매진해서 머리를 정리해 볼까도 싶었으나, 한 번 실수하면 모든 항공기의 동선이 꼬이는 관제탑 업무의 특성상 나사 하나가 빠져 있는 자신의 존재는 득은커녕 실일 게 뻔해서 포기했다.
집으로 가면 태주의 생각이 날 것 같았는데, 또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가는 길도, 주변 풍경도 익숙한 방향을 따라 질주하게 됐다.
결국 제집 앞 야외 주차장으로 진입한 차영의 차량이 전용 위치에 멈췄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데,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저 사람이 누군지는 명확히 알았다. 태주였다.
“어디 다녀와.”
“알 거 없어.”
무시하고 가려는 차영의 손목을 태주가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이차영, 기다려.”
차영은 꽤 거칠게 뿌리쳤다. 그런데도 태주는 다시 붙잡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 마찰이 거북해서 짜증스럽게 돌아보니, 몹시 절박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할 시간 달라고 했잖아. 나 아무 정리도 안 됐어. 너 이러는 거 피차 도움 안 돼.”
“정리하기 전에 내 이야기도 들어. 다 듣고 다시 정리해. 그날 일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있어야 너도 뭘 정리를 하든 수납을 하든 할 거 아냐. 지금 나 꼴 보기 싫다고 그걸로 끝이야? 그러면 너한테 진실은 누가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문 회장? 안 실장? 네 엄마?”
“그걸 다 알면서 사람 기만한 개새끼가 뚫린 입으로 말은 잘한다.”
“이제 감출 생각 없어졌다잖아.”
“이제? 여태껏 네가 날 속였다는 사실은 안 변해.”
“말을 안 한 거야. 아니, 못 한 거야! 네가 너무 좋아서!”
“...”
“차영이 너 이럴 거 뻔하니까.”
늘 단호하던 태주의 음성 끄트머리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차영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그 때문에 피해자인 자신이 어떤 의미로는 가해자가 된 기분마저 들어 그게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거야? 아니면 나를 많이 좋아해 줬으니까 넌 할 만큼 했다는 건가?”
“그렇게 말 안 했어. 얘기 좀 하자고 했지.”
“한태주!”
“나 속 편하자고 말하겠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너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정확히 알아야! ...뭐가 뭔진 알아야 될 거 아냐.”
차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미 내부에선 넘치고도 한참이었는데 당최 이걸 어떻게 외부로 토해 내야 맞는 건지 몰라서 그저 계속 들끓게 둘 뿐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던 차영이 태주를 냉랭하게 직시했다.
“그걸 그렇게 잘 아시면 왜 진작 말해 줄 생각은 못 했을까?”
“그러니까 이제라도 얘기 좀 해.”
“한태주 네가 이렇게 비겁한 인간인 줄 알았더라면...!”
거짓말은 안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있다고 하더니, 어쩌면 그때 그 말은 이런 상황에서 뱀처럼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몰랐다.
울컥한 차영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쏘아보자, 태주가 다시 차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조금 전보다 더욱 난폭하게 그를 밀어낸 차영은 태주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퍽 치고 그의 차량이 주차된 방향으로 앞서갔다. 그러고는 그가 자신을 뒤쫓는 걸 내버려 두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 사건에 대해 알려 줄 사람이란 한태주뿐이었다. 이윽고 태주가 제 차량으로 가까이 가서 조수석에 태우기에, 올라탔다.
뒤이어 운전석에 탑승한 태주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차영은 그저 언젠간 차를 세우겠거니 여기면서 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그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 * *
태주가 선택한 진실을 마주할 장소는 인근의 바다가 보이는 둔치였다. 방파제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데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마저 물씬 풍기는 기가 막힌 장소에 주차를 해 두고, 주변 경치를 잠시간 감상했다. 물에 비친 불빛들이 일렁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이런 일로 오는 게 아니라, 좀 더 명랑한 기분으로 왔다면 좋았을 법했다. 여느 때였다면 홀린 듯이 관찰했을 물 위로 노을이 지는 근사한 풍경마저 눈에 제대로 안 들어왔다. 그럼에도 차영은 꿋꿋하게 경치를 눈에 담으려 애썼다. 여전히 옆의 태주를 보기 싫었다. 그쪽도 자신을 굳이 쳐다봐야 한다면 옆모습만 봤으면 했다.
“이 마당에 난 또 기다려야 돼?”
차영이 창문을 더 아래로 바짝 내리면서 낮게 힐난했다. 태주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더니, 말리는 대신 그의 몸 위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차영은 그것을 뿌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태주가 그것을 주우려고 하자, 차영이 보란 듯이 그것을 발로 짓밟았다. 그 순간 정확히 타이밍이 맞아 서로를 쳐다본 덕분에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쉽게 시선이 부딪칠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눈동자로 태주를 보던 차영이 고개를 창밖으로 다시 돌려 버렸다.
“차영아.”
“말이나 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들 사이엔 유례없이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좋지 않았던 첫 만남에서조차 없었던 기류였다. 놀랍게도 다정다감한 차영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씁쓸한 숨을 삼킨 태주가 카 시트에 등을 기대어 전방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
“상관없어. 네가 아는 건 다 말해.”
힐끗 차영을 살핀 태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닌 의대생이었어. 우연히 학회에서 학교 선배인 아버지를 만났는데... 뭐. 사랑에 빠졌겠지? 그 증거로 내가 태어났으니까.”
마침내 그가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한태주의 고해성사가 시작된 것이다. 묵묵히 듣게 됐다.
“외할아버지는 가뜩이나 어머니가 경영 말고 다른 공부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 같아. 다만 어머니가 너무 강경하게 나오니까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셨겠지. 그런 상황에서 혼처까지 성에 안 차니까 화를 많이 내셨대. 당연히 두 분 관계 허락은 안 해 주셨고...”
“...”
“우리 아버진 친부모, 양부모 두 쪽 다 죽고 없는 입양아였는데, 줄곧 그게 콤플렉스였나 봐. 어머니 쪽 가족들이 축복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서 결혼은 미루고, 의사에 의사 지망생 커플이면서 피임은 제대로 안 했던 건지 내가 태어났어. 그런데 어머니가 날 낳다가 돌아가시게 된 거야. 그리고 그때 아버진 어머니와 나 중에... 날 선택하셨어.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둘 다 구하긴 너무 때가 늦었겠지.”
태주는 잠시 숨을 고르듯 침묵했다. 차영은 조금도 보채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 버거운 만큼 듣는 자신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서두에 불과한 벌써부터 이런데, 앞으로의 이야기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가 아득할 따름이었다.
“아버진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은 부모에게 위로를 해 주고 싶었대. 미국 생활은 다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날 데리고 본가 근처에서 살았어. 부모님 삼아서 그러고 싶기도 했을 거야. 그런데 외할아버지 눈엔 그런 아버지가 몹시 거슬렸던 것 같아. 나한텐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을 아버지 앞에선 한 번 열어 주셨던 적이 없었어.”
“...”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날 밤에 급한 환자가 있다면서 외할아버지 명령을 받은 안 실장이 아버질 데려갔어. 그 뒤로 난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그 이후부터는 네가 아는 대로야.”
평이한 어조에 차분한 음성은 큰 서러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태주는 침착했는데, 정작 차영의 눈가가 일렁였다. 눈을 가볍게 떴다 뜨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어났다는 것 외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이 죄를 다 감내하고 있는 한태주가 불쌍했고, 하필이면 그를 좋아하게 된 자신은 더욱더 불쌍했다. 차영은 울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괜히 몸을 뒤척였다. 활짝 열어 둔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그의 젖은 온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으나 큰 위로가 되진 못했다.
“나도 그날 안 실장을 봤어.”
어렵사리 꺼낸 차영의 음성도 태주의 것처럼 덤덤했다. 그러나 심해에 잠시 몸을 담그고 나온 것처럼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정면만 영혼 없이 향하고 있던 태주의 시선이 겨우 허락을 받은 사람처럼 측면만 보여 주고 있는 차영에게로 향했다.
“그땐 너무 어려서 어른들이 대화한 내용까진 잘 기억 안 나지만...”
“차영아.”
“적어도 우리 아버지 그날 술은 안 마셨어. 진짜야. 나는 알아. 나만 그걸 증명할 수 있었는데, 여태까지 멍청하게 기억도 못 했어. 죽어서도 얼마나 혼자 억울하셨을까.”
어깨가 살짝 들썩이는 모양새가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닦아 줄 수가 없었다. 만지면 뿌리치고, 그래도 억지로 만지면 결국 달아나 버릴 것 같아서 선뜻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86화
태주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차영이 네 짐작이 맞아. 우리 외할아버지가 사주한 일일 거야. 아니, 확실해. 아버지가 사고로 죽던 날 밤 외할아버지가 안 실장과 함께 내 침실에 찾아왔었어. 내 목을 졸랐지. 살려 둘지 말지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어. 결국 살려 줬고.”
“...”
“난 살아남았어.”
그날 이후 외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사는 동안, 그는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밤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언제든 다시 총구를 겨눠 자신마저 죽일지도 모르는 외할아버지가 아래층에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어린 태주를 밤마다 재워 준 게 외할머니였다.
사고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모두 알고 행한 일이었다니 그녀를 향한 원망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이 이럴진대, 차영이 느끼고 있는 배신감은 더한 게 마땅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며칠 뒤 사고 현장에 잔해 수습한대서 거길 찾아갔다가 널 봤어. 그렇게 어린 네가 상복 입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어. 또 현장에서 비 맞으면서 도와줄 사람을 찾는 네 어머니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안쓰럽고... 꼭 나 같았어. 난 쫓아다닐 사람이 없었다뿐이지 그러고 싶었거든.”
“...”
“그때부터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 해씩 자랐다.”
사고 직후라는 건 차영에게 너무 오래전 일이다. 너무 어렸던 터라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기도 했다. 안 실장이 아버지를 찾아왔던 날의 기억처럼 무의식에 깊이 묻혀서 아주 어렴풋한 느낌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실장을 다시 보게 됐을 때처럼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리지는 않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때의 자신은 태주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한참을 태주의 말을 곱씹던 차영이 괴롭게 입을 벌렸다.
“나를 보면서? 내 피 빨아먹고 네가 컸다는 이야기 하는 거야?”
“차영아.”
“결국 이 긴 대화를 한 줄로 정리하면 한 기장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정말 설마설마했는데...”
침착한 목소리의 끝이 끝내 조금 떨렸다.
“내 앞에 왜 나타났어?”
“널 오래 지켜봤어. 아주 오래. 언젠가부터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
“동정이야? 아니면 죄책감?”
“네가 좋아서.”
“이게 사랑이라고? 그게 가능해? 착각이나 정신병 아니고?”
“난...”
“네가 무슨 염치로 날 좋아해?”
그 문제 관한 한 태주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줄은 알았는데 정말 제멋대로다. 네까짓 게 무슨 염치로... 무슨 자격으로 나 좋아하는데. 그래 봤자 너희 외할아버지고, 네 아버지야. 그 두 사람 사이만 원만했어도. 아니, 애초에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너한테 생명을 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우리 아버진 안 죽을 수 있었던 거네? 네가 이 역겨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나 있어?”
한국에 공항이 수백, 수천 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제 앞에 나타난 것까진 백 번 양보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자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 번 양보해서 정말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면, 미리 이 모든 사실을 전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경고를 해 줬어야 옳은 일이다. 그를 좋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권했어야 맞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가늠도 안 갔다.
화를 참을 수가 없어진 차영이 제 몸을 똑바로 세우고 태주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얼굴이 눈물로 젖어 흥건해져 있는 상태였다. 참담한 표정으로 그걸 쳐다보고 있는 태주는, 차마 손을 뻗을 수는 없는 모양인지 팔을 움찔했다. 그리고 차영의 눈에 그의 이런 반응마저도 가증스럽게 보였다.
“나 바보 아냐. 한 기장이 무슨 잘못이 있어. 부모도 자식이 고를 수 없는데 하물며 한 다리 건너인 외할아버지가 그쪽 어릴 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게 뭐야. 나도 머리로 알아. 하지만 그건 내가 자의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인정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도 가능하면 이러지 않으려고 해 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이 통제가 안 됐어. 너와 가까워진 이후로도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 사이 간극이 손도 못쓸 정도로 벌어지게 될까 봐... 입이 안 떨어지더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말하려고 했으면 진작 했어야지. 내가 너 이렇게 좋아하게 되기 전에!”
“네 말이 다 맞아. 미안한 게 너무 많아서, 대체 뭐부터 사과해야 할지도...”
분노한 차영은 그의 말을 불쑥 끊어 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어. 넌 나한테 이런 상황 다 알려 주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줬어야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한태주 씨가 좋다고 한다면 모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스스로 널 선택할 수 있게 날 기다려 줬어야 했다고. 이게 뭐야. 나 지금 엄마 아빠 볼 면목이 없어서 너무 비참해!”
처음에 차분하게 시작했던 비난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태주는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차영 또한 그가 감수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의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자신은 소중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평생 괴롭게 살아야만 했다. 적절한 때라는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시기가 되어 사람이 죽는 것도 슬픈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아침에 소중한 가장을 잃었고, 또 너무나 억울했는데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들어 주지도 않았다. 줄곧 그 주홍 글씨가 낙인처럼 박혔다.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제 일에 성실하게 임하며 살았을 뿐인데. 생명이 위태로운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늦은 밤 제복을 갖춰 입었을 따름인데.
평생을 명예롭게 여기던 조종사로서의 직위는 박탈당하고, 모든 권리도 권한도 행사할 수가 없어지고 말았다. 심지어 아무도 그를 의롭게 기억해 주지 않았다.
“우린 슬퍼할 자격이 없었어. 아버지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 평생 괴로웠어. 아버질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혹시나... 혹시나 한 번 실수한 건 아닌가. 아무도 없을 때, 나 혼자 있을 때, 밤하늘에 뜬 소형 비행기를 볼 때마다. 매번, 매번! 아무도 몰래 아버지 의심했어. 그게 너무 미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이런 속내는 제 어머니에게도 솔직히 꺼내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속상해할 것을 알기에 그러지 못했다. 처음으로 태주의 앞에서 털어놓게 됐다. 그리고 이 본심을 입으로 직접 내뱉으면서 너무나 뼈아팠다. 줄곧 찾고 싶었던 유가족은, 이미 이 사고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데 엄청난 배신감이 일었다.
“최소한 너랑 자기 전에는 말을 해 줬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참담하진 않았을 거 아냐. 이래서 너 나한테 조급하게 군 거야? 날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나에 대한 배려가 단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이렇게 이기적인 게 사랑이라고? 자기만족이 아니라?”
“차영아.”
태주가 차영에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자, 차영이 있는 힘껏 쳐 냈다.
“만지지 마! 이 역겨운 새끼야. 너 진짜 구역질 나.”
태주에게 싸늘한 시선을 내던진 차영은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태주가 황급히 쫓아 나오면서 차영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그가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고는 두 다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나 한 기장 정말 좋아해. 찌꺼기 하나 안 남기고 전부 다 털어 버리고 과거형으로 말하면서 차고 싶은데 아직은 그게 안 되는 게 진짜 열받는다. 나 이거 오래 생각한 건 아닌데. 아마 오래 생각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야. 우리 헤어지자.”
“그렇겐 못 해.”
계속 차영의 말이 모두 맞고 자신이 틀리다는 양 저자세로 나오던 태주도 이 말만큼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럼 넌 혼자 계속해. 난 끝낼 거니까.”
“절대 못 헤어져. 그런 일 없어.”
탁! 차영이 조수석의 문을 난폭하게 닫았다.
“난 내 의사 분명하게 전했어. 그러니까 더는 쫓아오지 마. 잡지도 마.”
“이차영! 잠깐 기다려.”
“더 듣기 싫어.”
“내 말 더 들어 달라는 거 아냐. 여기까지 내가 데려와 놓고 혼자 가는 걸 어떻게 봐.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집까지 데려다주게만 해 줘.”
이 말과 함께 태주가 한 걸음 접근하려 하자, 차영이 두 손으로 앞을 가리듯 척 막아 냈다. 그러고는 쌀쌀맞은 말투로 덧붙였다.
“못 알아들어? 너랑 같이 있기가 싫다고! 경고하는데 이 이상 가까이 오면 이대로 물에 뛰어들 거야. 난 한다면 해. 나 앓아눕게 만들고 싶으면 쫓아와. 그게 네가 말하는 그 엿 같은 사랑이라면 내 기분 좆같이 만드는 걸로 모자라 나까지 죽게 두든지. 네 결정에 따를게. 그러고 싶으면 쫓아와.”
차갑게 경고한 차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주를 냉정하게 거부해 놓고 본인이 더 상처받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참 뒤편에 서서 차영이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는 험한 꼴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붙잡으려던 결심을 고쳐먹었다. 그는 차영이 바로 오늘 오전까지 계속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겨우 되새기고, 가까스로 참아 냈다.
조금씩 뒷모습이 작아졌다.
택시를 잡는 모습이 보여서, 겨우 태주도 무너지듯 차체에 기댔다. 그러고는 이미 노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금세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타악! 상체를 들썩여 차체에 등을 부딪친 그는 괴롭다는 양 지그시 눈을 감았다.


87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제 하루는 지금까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것에 관한 사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정신없이 보냈는데 한번 냉정함을 되찾자 그때부터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났다. 자신은 아직 태주의 외할아버지와 끝내지 못한 중요한 용건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육성을 구하는 일이다.
거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모른다. 직접 들어 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다. 애초에 별로 중요한 내용이 녹취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고, 있었대도 아마 문 회장이라면 핵심적인 부분은 다 쳐 내고 넘겨주리라.
아마 앞으로도 거창하게 복수 같은 건 하지 못할 것이다. 차영은 사리 판단이 빠르고 현실적인 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한 기업체를 이끌어 가는 그를 상대하기에 자신은 너무 작고,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필요했다. 죽기 전 마지막 음성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사고의 판을 짠 문 회장 쪽에서 지니고 있다는 건 용납이 안 됐다.
퉁퉁 부은 얼굴로 집 밖으로 나온 차영은 차에 시동부터 걸었다. 뭔가를 마음 깊이 결심한 듯 분연히 걸어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가 제 뒤를 급히 쫓는 것을 느꼈다. 순간 지난번에 제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던 문 회장의 수하들은 아닐까 마음을 졸였으나, 몸이 먼저 그들이 아님을 알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
“이차영, 너 지금 어디 가는데.”
“상관 마. 난 내가 해야 할 이야기 다 했어.”
“잠깐 기다려.”
“나 또 내 안전 문제 걸고 협박해야 돼? 그래야 관둘래?”
차갑게 등을 보이며 차에 타려는 차영의 앞을 태주가 막아섰다. 그는 운전석을 향해 뻗은 차영의 손을 강제로 밀어내더니, 반쯤 연 차 문마저 거칠게 닫았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막아서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끝났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 주어야 그가 납득할지도 아직까진 흐렸다.
“한 기장, 본인 외할아버지 닮았구나. 기질이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거. 이제 보니 똑같다.”
“기대를 망쳐 미안하지만 나 외할아버지, 안 닮았어.”
태주의 음성이 어울리지 않게 쓸쓸했다. 그러나 차영은 그에게 상처 주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기꺼이 헤어짐 외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여태 네가 나한테 함부로 했던 모든 짓이나 되돌아보고 말해.”
“꼭 해야 될 말이야. 어제는 예전 일 이야기하느라 미처 설명을 못 했어. 듣고 가.”
“못 하신 분 혼자 해. 난 들을 의무 이제 없어.”
“너 대체 지금 어디 가는데. 문현기 회장 만나러? 거긴 혼자 가면 안 된다는 거 몰라?”
다신 그에게 웃는 얼굴 같은 건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 말도 한 적 없으나 이미 그가 제 행선지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너 내 집에 도청기 같은 거라도 심었어?”
“그런 짓 안 해. 나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안 할 거 알잖아.”
“아니, 나 전혀 모르겠는데. 우리 사이의 신뢰를 먼저 깬 게 누군지, 잊은 건 아니지?”
“물론 나야. 회피할 생각 없어. 하지만...”
이 대답의 말허리를 잔혹하게 끊어 낸 차영이 코웃음 쳤다.
“하지만? 내가 단순히 사실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아서 이래? 넌 내 자존심과 엄마 아버지에 대한 의리, 사랑 다 짓밟았어. 뭐 나라를 구한다거나 정의를 수호한다는 대단한 이유도 아니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런 거였지. 그래 놓고, 하지만? 그 뒤에 무슨 말씀을 하실 건데?”
“나라를 구하는 일이나 정의 수호보다 나한텐 훨씬 납득되고 충분한 이유였어.”
“와, 너 진짜 개새끼다. 이건 쓰레기장에서 소각도 안 되겠네.”
“내가 억지 쓰고 있는 거 알아. 나 얼마든지 함부로 대해도 돼. 그래도 난 앞으로 계속 너 좋아할 거야.”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차영이 버럭 소리치자, 계속 침착하게 응수하던 태주도 조금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왜 말이 안 돼? 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이 짓 계속할 거라고. 난 자신 있어. ‘아! 지겨워서 그냥 계속 사귀어 줘야겠다’ 소리 네 입에서 나올 때까지 질척거릴 거야. 그런 각오도 없이 네 앞에 나타났을까 봐?”
태주가 제발 자신을 좀 쳐다봐 달라는 양 차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기울여 눈을 분명하게 마주치려고 들었다.
어제도 그에게 직접 말했다시피 아직 차영은 그가 좋았다. 치달아 있던 감정을 하루아침에 두부 자르듯 잘라 내는 건 불가능했다. 단지 본능적으로 여기서 더 가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밀어내려고 마음먹었을 뿐이다. 그래서 눈을 보면 설레고, 한편으론 흔들렸다. 이렇게 휘둘리는 일분일초가 죄스러워지는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 못 했다. 아랫입술을 힘껏 깨문 차영이 그를 뿌리치기 위해 제 몸을 비틀었다. 쉽지 않았다.
“이거 좀 놔!”
“차영아, 나한테 이러지 마. 이해해 달라는 거 아니야. 미워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조금만... 나를 참아 줘. 응?”
“적반하장도 이 정도면 병이다. 이러지 말라는 소린 내가 그쪽한테 해야 맞는 거 아냐?”
차갑게 태주를 쏘아보는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다. 분명히 연민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 기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 적대감들이 마치 어둠처럼 도사렸다.
“제발 그냥 나는 나로 봐 주면 안 돼? 나는 그냥 한태주고...”
“한태주 씨, 내가 그냥 이차영이었으면 그쪽이 나 좋아했을까? 너랑 난 서로가 같은 남자에 생활 습관도 활동 범위도 너무 달라. 나 같은 거 안중에도 없고 어디에 사는지, 뭘 먹고 입는지 관심도 안 줬을 거란 생각 안 들어? 아마 평생 안 마주치고 살았을 거야, 우린. 너 그냥 평범하게 여자 만나 연애하고, 결혼도 했겠지.”
“그랬을지도 몰라. 그래도 널 어떻게든 알게 됐다면 난 반드시 널 좋아했을 거야.”
“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정신 승리 하는 건 네 소관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래도 우린 부모님 문제를 분리해서 존재할 수도, 서로를 볼 수도 없어. 왜냐하면 나한테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
“나도 그냥 한태주일 때는 너 좋아했어. 그런데 내 부모님 원수 외손자는... 네가 나 대신 그 사람을 죽여 주지 않는 이상 나 평범한 사람이라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어. 이제 진짜 비켜.”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상대에게 없어 보였는지, 차영이 그를 직접 완력으로 밀어냈다. 실제로 순순히 밀려나 줄 생각이 전혀 없던 태주가 좀 더 오래 차영을 붙들어 두려고 했다.
그러자 차영이 갑작스럽게 태주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 그는 태주가 제 상체를 방어하는 데 집중하게 만들더니 뒤이어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억, 하면서 허리를 숙인 태주의 빈틈을 공략해 그를 밀어내고 결국은 탑승에 성공했다. 그 바람에 겉옷 대용으로 손에 쥐고 있던 얇은 회색 셔츠가 툭 떨어졌다. 그러나 문을 열어 그걸 줍는다면 또다시 태주에게 붙잡힐 게 자명했다. 완력 차이가 있어 편법을 쓰지 않는다면 그를 이기는 게 어려웠다. 그렇다면 저걸 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벨트를 매면서 차량의 문을 단단히 잠그자, 창밖에서 태주가 창문을 두드렸다. 차영은 쳐다봐 주지 않았다. 그저 후면을 보면서 후진을 시도했다.
“차영아, 차영아! 문 회장 보러 가지 마. 그 사람 절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그 문젠 내가 부딪쳐서 해결하게... 이차영!”
태주가 절박하게 붙잡아 봤으나, 이윽고 야외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영의 차는 뒤꽁무니마저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제 차에 시동을 걸던 태주는 차영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진 얇은 셔츠를 주워 들었다. 희미하게 그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당장 차영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제 침대 위에 눕히고 싶은 파괴적인 욕망과 이렇게 냉랭하게 나오는 그가 이해가 되고 마는 정반대의 감정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하...”
그는 낮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제 차영은 본인에게 직접 선택할 시간을 주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태주를 좋아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에 기댄 너무 단편적인 시각이다. 비명에 죽은 아버지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던 차영에게 제 외할아버지가 그분을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가족에게 애틋했던 그는 자신을 쳐다봐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함께 있고 싶었고, 그가 울 때 곁에서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비겁했던 건 맞지만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그걸 골랐을 터다. 자신이 무슨 마음으로 그의 앞에 정체를 드러냈던 건지 그 심경만은 헤아려 주길 바란다면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일까.
“차영아, 제발...”
아련하게 코끝에 맴도는 차영의 향기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88화
대영 한국 항공의 본사 사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일부러 목적을 가지고 위용 넘치게 지어 놓은 것인지 건물이 무척 높고 외관이 화려해서 들어가기도 전부터 방문자의 기를 죽일 듯했다. 그러나 두어 번 문 회장과 독대를 해 본 차영은 그의 앞에서 어깨가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는 순간 승부를 걸어 볼 틈도 없이 무너지게 되리라는 것을 배웠다.
어깨를 펴고 로비로 들어선 그는 상냥한 미소를 보이는 프런트 데스크의 직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 문현기 회장님 출근하셨나요? 면담 요청하러 왔는데요.”
“미리 약속하셨습니까?”
“약속한 건 아닌데, 제가 누군지 설명하면 아마 만나 주실 거예요.”
“아... 실례지만 소속이 어디십니까?”
“저 소속은 따로 없고, 이차영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비서실에 먼저 문의드리겠습니다.”
사실 퇴근 시간에 맞춰 문 회장의 자택으로 찾아가는 편이 자신이 꺼낼 이야기의 은밀함을 고려한다면 더 적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며칠 전 본의 아니게 감금되어 있었던 곳이 태주의 본가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어서 그쪽으로는 발걸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차영이 비서실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이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프런트 직원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임원진 전용 승강기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걸 타고 올라오시랍니다.”
특권을 누리고 살아온 사람들은 저게 당연한 것인 줄 알지만, 평범한 사람인 차영은 특정 집단을 위한 전용 승강기라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더 자신이 모르는 그들만을 위한 권리들이 차고 넘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아마 저층부터 29층까지에 해당하는 층수 버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위부터를 임원들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차영을 홀로 태운 승강기가 서서히 상승 기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계기판의 숫자도 함께 하나씩 올라가는 동안, 그는 훤히 뚫린 유리 너머를 내다봤다. 빌딩 근방의 풍경들이 내려다보였다. 건물 정문 바로 앞은 도로변인 데다 주변에 삭막한 빌딩들이 밀집해 있긴 하지만, 또 그리 멀지 않은 근처에 숲이 보이고 강도 흘러서 시야는 퍽 장관이었다.
어느 틈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무심코 계기판을 봤는데 이곳에는 층이 없었다. 천천히 내리니 비서실이 웬만한 팀의 사무실보다 훨씬 커 보였다. 일일이 센 건 아니지만 눈대중으로도 직원만 벌써 열 명이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안 실장이 꾸벅 인사해 보이며 차영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직원들도 일어서서 차영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비서들이 제자리에 앉아 있었던 터였다. 그들의 서열 판단 기준은 안 실장이 취하는 태도인 것 같았다.
“이차영 관제사님, 오셨습니까.”
차영은 움찔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들을 때마다 계속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기만 하더니, 한 번 과거를 인지하고 나니까 어릴 때 들어 본 목소리란 것을 알 것 같았다.
“회장님 안에 계신가요?”
“네, 방문 의사 전해 드렸더니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천히 차영 쪽으로 다가온 안 실장은 이곳이 마치 공항의 수색대라도 되는 것처럼 차영의 몸을 점검했다. 그러고는 차영에게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이 없다고 여겼는지 휴대폰만을 반납하게 하고 그제야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그가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채고 문을 열었다. 이윽고 묵례해 보인 그가 차영을 앞세웠다. 동시에 뒤편에서 도로 문을 닫았다.
정면의 상석에 문 회장이 버티고 있는 게 바로 보였다. 구도가 익숙해서인지 명부전에서 저 노인을 마주 봤던 일이 떠올랐다. 문 회장도 그 일을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안 실장을 내보낸 상황까지 똑같았다.
차영은 사념과 공포를 함께 털어 내기 위해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저벅저벅 걸어 그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의외로 꽤 흥미롭다는 눈길로 차영을 주시했다.
“날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겁이 없구나.”
“이제 회장님이 절 해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전에는 나한테 그런 의사가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네 오해란다.”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은 차영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오늘 날 찾은 이유는?”
“헤어졌습니다, 한 기장이랑.”
“태주 놈 생각이 그러니?”
“제 의사가 중요하죠.”
“아니야. 태주 의사가 훨씬 더 중요하지. 내가 좋아하는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동물이 평등해도, 어떤 동물은 그보다 훨씬 평등하다고.”
“요즘 같은 시대에 계급주의자신지는 몰랐는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기 마련이지.”
“사리 분별 못 하고 시대착오적이시라는 말을 돌려 한 건데, 말귀가 좀 어두우신 것 같네요.”
시종일관 너그럽고 유연한 태도를 고수하던 문 회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은은하게 입매에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졌다. 차영이 이곳에 싸우고자 왔음을 인정해 주고, 또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 주겠다는 의사 표현 같았다.
그의 눈빛이 변하자, 애써 되바라진 흉내를 내고 있던 차영은 내심 맨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부디 눈앞의 상대에게 제 긴장이 전이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일단 말을 해 봐. 판단은 듣고 하마.”
“한태주한테서 떨어져 나가 드렸어요. 그러니까 이제 저희 아버지 육성 넘겨주세요.”
“그건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었고. 너희 두 사람이 분리됐다는 확신은 어떻게 줄 거지?”
이는 무척 무책임한 발언이다. 차영은 발끈했다.
“결국은 그냥 말장난 같은 거잖아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회장님이 확신이 안 선다고 말하면 끝인 거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치사해 보이니? 그래서야 이만한 규모의 기업체 수장이라고 어디 가서 말 못 하지. 난 신의로 일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 일에 앞장서고 본을 보이니까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그다지 너그럽지 못할 수 있는 거야.”
“제가 뭘 하면 믿으실 건데요?”
“이쪽 생활 정리하고 어디 멀리 가서 숨을래?”
진짜 별 이야기를 다 듣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오래된 통속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제 일상이 흘러가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구태의연하고 촌스러웠다.
한태주만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언제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지루하고, 때론 외롭기도 했겠지만 최소한 이런 추잡한 꼴을 보지 않아도 됐다.
제 아버지의 사고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됐는데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비참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권력의 크기를 가늠하지도 못할 권위자에게 기절한 채 끌려가거나 하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하필이면 가장 최악의 선택지와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자책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오직 그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달콤함은 짧고 씁쓸함은... 얼마나 길어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래가 아득했다.
“제 일은 어쩌고요.”
“돈이 필요하면 주마. 네 아버지가 우리 항공사 기장이었으니, 직원 복지 한다고 생각하마.”
“필요해지면 말씀드리죠. 지금은 입에 풀칠할 정도론 법니다.”
“관제사를 관둘 생각이 없단 말이구나.”
“없습니다. 시험 보고 정정당당히 합격했어요. 철 밥통을 왜 걷어찹니까. 회장님이 뭐 얼마나 떼어 주실 줄 알고요. 한 수천억 주실 건가요? 한태주는 제가 그걸 받을 자격이 있다던데요.”
문 회장은 가볍게 웃었다.
“너 대체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굴 닮았니? 아주 건방진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문 회장이 일부러 제 부모님을 입에 올린 것이라는 부분은 너무나 잘 알겠다. 몹시 모욕적이었다. 차영은 착하지만 순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 문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기를 불사했다.
“원래 아버지 없이 큰 아이들이 쉽게 이렇게 됩니다. 보호막이 없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하거든요. 한태주 기장도 못 배워 먹고 꽤 건방지던데. 그건 회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
“어느 안전이라고 계속 그 이름을 입에 올려!”
“저도 회장님 앞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요. 음성이나 주세요. 헤어졌다잖아요.”
“태주를 설득해.”
“제가 왜 이미 헤어진 상대를 설득하기까지 해야 합니까.”
“내가 태주한테 바라는 건 단순히 너와 헤어지는 게 아니다. 네까짓 거? 얼마든지 데리고 놀 수 있어. 그놈이 너 같은 아이 수백 수천 명을 데려와도 난 눈 하나 깜빡 안 한다. 그 애가 전부 내려놓고 내 밑으로 들어와서 양자가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어쩐지. 뭔가 미묘하다고는 줄곧 느꼈다. 자신 같은 민간인 하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문 회장이 직접 공항으로 찾아와 만남의 자리를 갖고, 또 제 수족들을 써서 눈앞에 대령하게 만든 데다가, 태주가 자신을 찾아 모셔 갈 때까지 치료와 함께 방치해 뒀다는 건 이상하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이상했다. 마치 그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듯했다. 자신을 매개체로 태주를 자극해 그를 설득하는 데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회장님께 납치 감금으로도 모자라 폭행까지 당했다고 경찰서에 가서 진술하겠습니다. 법리로 다투길 바라세요?”
“네가 강단은 봐 줄 만한데 세상 물정은 아직 잘 모르는구나. 뭘로 다투든 넌 지게 돼 있다.”
물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저 회장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무슨 몹쓸 짓 했는지 다 알아요. 그래도 하라는 대로 굴욕적으로 기어들어 와서, 우리 아버지 마지막 음성 그거 하나 달라는데...! 그걸 대체 당신이 왜 가지고 있는 건데! 더러운 사람 손에 쥐어져 있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건에도 더러운 게 묻어. 당장 돌려줘.”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는 하극상에 분노한 문 회장이 제 손아귀에 잡힌 물컵을 꽉 쥐었다. 시종일관 냉정한 태도로 평정을 유지하던 그가 표정에 화를 내비치자 차영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윽고 문 회장이 컵을 차영에게 던지려고 손을 뻗는데, 동시에 뒤편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잠시 비서실의 업무 환경을 살펴본 게 다였지만 문 회장의 집무실은 어떤 불가침 구역 같았다. 반드시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고, 여기에서 내리는 지시는 바깥의 모두에게 절대적인 그런 신전 같은 장소 말이다. 그런데 노크 하나 없이 무례하고 뚫고 들어오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이거 놔.”
문이 반쯤 열리자 매우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신이 사랑에 빠지는 데 크게 공헌한 아주 낮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은 차영이 묘한 불안으로 괜히 주먹을 꽉 쥐어 봤다.
아니나 다를까. 만류하는 비서들을 강하게 뿌리치고 어떤 키가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눈매의 그는 숨을 몰아쉬며 거침없이 들어와선 차영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태주였다.


89화
“한태주...”
혼잣말을 하듯 그의 이름을 곱씹는 사이, 태주가 오직 차영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집무실 가장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등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딸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차영, 괜찮아? 내가 여긴... 혼자 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마치 자신을 보호하듯 앞을 막아선 태주 덕분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그가 너무 미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차영은 그를 보게 된 이 순간 무척 안심됐다.
그리고 문 회장은 태주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 지금까지 차영이 한 그 어떤 말보다도 화가 났는지 물컵을 태주에게 던져 버렸다.
턱! 그의 어깨에 거세게 맞고 떨어진 유리컵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태주의 옷자락은 한쪽이 전부 젖었다. 그런데도 그는 축축해진 부위를 힐끗 쳐다보는 기색조차 없었다. 유리컵의 파편들을 지르밟고 차영의 손목을 붙잡아 자리에서 묵묵히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 회장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 문젠 저랑 이야기하세요. 분명히 말씀드렸잖습니까.”
“글쎄다. 선후 관계가 틀렸다. 먼저 찾아온 쪽에 책임을 물어야지.”
“회장님은 원인과 결과가 틀리셨습니다. 이차영이 백 번을 먼저 찾아와도 책임은 회장님한테 있어요. 저 제가 아는 거 차영이한테 다 말했어요. 차영이도 다 알아요. 그러니까 입이 뚫려 있어도, 회장님은 이차영이랑 흥정을 하시면 안 돼요.”
제 할 말을 덤덤히 전하는 태주를 지켜보던 문 회장의 눈이 상대를 탐색하듯 가늘어졌다. 지금부터 그가 어떻게 할지를 지켜보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자신을 누가 어떤 눈으로 보든, 말든 태주의 시야에는 오직 차영뿐이었다. 그는 버티고 서 있는 차영을 좀 더 제 뒤쪽으로 숨기듯 잡아당겼다.
“넌 따라 나와.”
“이거 놔.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나와!”
그는 버럭 소리쳤다. 여태까지는 들어 본 적 없는 무척 고압적이고 냉정한 음성이었다. 깜짝 놀란 차영이 후속 행동을 못 하고 머뭇대는 사이, 태주가 억지로 차영을 끌어당겼다.
차영의 손목을 붙든 채로 막무가내로 집무실을 빠져나오자, 안 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태주로부터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알 길이 없어 긴장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그런 비서들에게도 시선 한 자락 주는 법이 없었다.
빠르게 비상계단 쪽으로 차영을 밀어붙인 그는 쫓아오지 말라는 듯한 손짓만 안 실장에게 보내고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자칫하면 넘어질 뻔한 차영은 별반 저항도 못 하고 딸려 갔다. 붙들린 손목이 너무 아팠다.
이윽고 한 층가량 아래로 내려왔을 때라야 태주가 내던지듯 차영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타악! 내동댕이쳐진 차영의 상체가 딱딱한 벽에 부딪혔다. 통증을 느낀 차영이 날카롭게 소리쳤으나 태주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꽤 흥분한 듯했는데, 그건 어울리지 않게도 어떤 크고 아득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차영을 내던진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휴대폰을 어깨 위로 난폭하게 던졌다. 툭, 제 몸에 맞고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주머니에 넣은 차영이 그에게 너무 억세게 쥐여 있던 탓에 살짝 붉어진 자신의 손목을 매만졌다.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태주가 선물한 시계를 차마 찰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른 걸 차기도 기분이 오묘해서 관뒀다. 마치 맞지 않는 시곗줄이라도 오래 찼다가 뺀 것처럼 그 자리가 고스란히 부어 있었다.
“너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와.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돼? 문 회장 아주 잔인한 사람이야.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여길 혼자 오면 어쩌자는 거야!”
태주는 저 안에서 문 회장과 독대하고 있었던 차영을 본 순간 느꼈던 아찔함을 되새기자 구역질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차영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스토커처럼 쫓아온 한태주 씨가 더 잘 알겠네.”
“이차영 제발...!”
절박하게 내뱉은 그의 음성이 울먹임과 뒤엉킨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여태 여러 가지 그의 모습을 봐 왔지만 당장 울음을 토해 낼 듯 괴로운 표정으로 호흡 조절조차 제대로 못 하는 광경은 처음이다. 덕분에 차영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겁이 없는 거야, 멍청한 거야. 저 사람들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어려워 보여? 너랑 내 아버지 사건 알면서도 바보같이 굴래? 문 회장한테 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거? 일도 아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여길 올 생각을 왜 해! 안전지대로만 다녀도 모자랄 판에! 누구 속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어?”
“앞으로 한 기장이 어떻게 사는지 나랑 관계없어. 속이 뒤집어지든 말든.”
“그딴 엿 같은 소리 좀 집어치워! 나더러 너까지 잃으라는 거야? 내 뒤에 꽁꽁 숨어 있어도 지켜 주기가 버거운데 왜 자꾸 엇나가, 왜!”
눈을 마주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계속 제 손목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려 태주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가가 분노와 걱정으로 일렁이는 게 들여다보였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제 얼굴을 보고 뭘 읽어 냈을까.
안전 불감증에 걸려서, 또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돼서 여기에 혼자 온 게 아니다. 물론 앞뒤를 안 재 보고 달려온 건 맞지만 터무니없는 객기를 부리려던 것도 아니었다.
문 회장 같은 노회한 작자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위험천만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것. 그래야 상대도 제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협상에 응해 올 터라는 판단에서 벌인 일이다.
“너 뭔데 나한테 화내? 너한테 그럴 자격 있어?”
“내 감정 내 거니까 멋대로 하라며. 널 좋아하든 말든 네 소관 아니라면서! 난 너 안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할 거야. 어떻게든 너 지킬 거고! 무엇보다 이 연애도 끝까지 지속할 거야. 내 마음 내 거니까. 우리 시작할 때 상호 동의했지. 끝도 마찬가지야.”
막무가내로 나오는 그를 설득할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한 차영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러자 태주가 덧붙였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소용없어. 네 어머니한테 어마어마한 슬픔 하나 더 얹어 드릴래? 승산도 없이 문 회장을 쓸데없이 너무 자극하지 마.”
“한 기장은, 안 죽어? 댁이나 잘해. 그쪽 외할아버지 성질 긁어 대는 꼴 보아하니 나보다 한 기장이 먼저 죽을 것 같으니까.”
“문 회장은 본인이 자살하는 한이 있어도 난 안 죽여. 왜? 자기가 평생 몸 바친 회사 남 주긴 아깝거든. 그런 탐욕스럽고 비상식적인 인간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해!”
“그럼 나랑 헤어져 줘. 그쪽 외할아버지가 단번에 납득이 갈 정도로 완벽하게 우리를 분리하고, 그 사람 밑에 들어가서 일도 하고, 양자도 돼 줘.”
“뭐?”
시종일관 미간을 찌푸리고 분노를 토해 내던 태주가 순간 무척 황망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든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왜 내가 문 회장 밑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고 양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아버지 사고 당시 음성 넘겨준다잖아!”
“음성?”
아버지의 육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건 태주도 모르는 영역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의아하게 차영에게 되물었으나, 의미 있는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차영이 불쑥 단전에서부터 억울한 마음이 차올랐는지 그를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소리 질러, 왜 나 윽박질러. 네가 뭔데, 개자식아! 너만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난 이런 거 모르고 그냥 가끔 울고... 그냥 살았잖아. 그 정돈 다들 울어. 그런데 너 때문에 더 억울하고 분해서 난 매일 울게 생겼어. 그런데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나한텐 없어! 저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겨!”
대관절 어째서 우리가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쁜 짓을 한 건 문 회장과 그의 주변 사람들이고, 죽어 버린 건 또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인데. 고통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남겨진 두 사람이 죄다 몰아서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하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차영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무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데 또 함부로 덤비기엔 자신이 너무 볼품없고 나약해서 두려웠다.
무엇보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태주를 생각하면. 그의 말대로 슬픔을 하나 더 얹게 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소한 차영은 평생 그를 잊지 못하게 되리라.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소리 높여 태주를 비난하던 차영은 결국 가쁘게 호흡을 몰아 내뱉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그걸 느낀 태주가 제 손을 달싹이다가 차영의 어깨 위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차영을 와락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차영이 움찔했다. 벗어나려 몸을 비틀어 대자 태주가 더욱 강한 손아귀 힘으로 차영을 포박하듯 안았다.
“1분만. 좀 안아 주자.”
한참 버둥거리던 차영은 그를 더 밀어내고 싶어도 더는 여력이 없어 엄두가 안 났다. 사실은 조금 전 문 회장의 앞에서 지나치리만큼 긴장하고 있던 터라 지금 자신이 두 다리로 어떻게 땅을 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신 바르작거리던 차영은 결국 온몸에 전류가 도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의 품에 안겨서 서러움을 토해 냈다. 저항이 잦아들었다고 느꼈는지 태주가 차영을 감싼 팔에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마침내 우는 차영을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안고, 마른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위로엔 서툴지만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90화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흐느끼는 이의 머리 위에서 가볍게 흩날렸다.
“내가 잘못했어.”
가까스로 참회의 말을 내뱉은 태주는 길게 심호흡했다.
“내가 네 앞에 나타난 건 널 좋아하는 날 위해서였던 게 맞아. 이제 안 그럴 거야. 앞으론 내 시간을 널 위해서 쓸게. 제발 기회를 줘. 한 번만, 딱 한 번만.”
거기까지 들었을 때, 차영은 제 눈물이 거의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옛말처럼 모로 가도 서울로 가는 데 성공하기만 해도 되는 거라면 태주는 이 과거 고백이라는 행로로 차영의 눈물 그치기에 성공한 셈이다. 어렵사리 제 몸을 태주에게서 떼어 낸 차영이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뒤늦게 그도 차영에게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얼굴에 흥건한 물기를 닦아 주려 태주가 손을 뻗었으나, 차영이 고개를 돌렸다. 보통 흔해 빠진 드라마 속의 이런 장면에선 씁쓸한 한숨을 삼키면서 물러서는 게 일반적일 테지만 태주는 그러지 않았다. 굳이 차영의 턱을 제 쪽으로 향하게 만들더니 축축한 눈물을 커다란 손으로 끝끝내 꼼꼼히 전부 닦아 주었다. 차영은 당연히 뿌리쳤다.
“필요 없어. 우린 이미 헤어졌고...”
“정말 미안한데, 난 그렇게 못 해 줘.”
“내가 싫다는데 대체 왜 이래. 이게 날 위해 네 시간을 쓰는 거야?”
차영이 허탈한 마음 반, 어이없는 마음 반을 빼곡하게 음성에 담아 내뱉었다. 그러나 태주는 흘려 넘겼다.
“내가 도와줄게.”
“대체 뭘 어떻게 도와줄 건데.”
“우리가 헤어지는 거 빼고 전부 다.”
“하... 그냥 헤어지기나 해 줘. 그리고 한 기장 외할아버지한테 가서 나랑 헤어졌다고 말해. 제발 부탁이야. 나 그 음성 꼭 필요해.”
“넌 문 회장한테 아무것도 못 얻어 내. 나 그 사람 잘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 내가 해 준다잖아. 제발 날 좀 이용해 줘. 부탁이야.”
“...”
“아버지 사고 당시 음성이라는 게 뭔지부터 설명해. 내가 찾아볼 테니까.”
사실 차영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란 짐작 정도는 이미 넘치게 하고 있었다. 문 회장의 제안대로 어딘가 멀리 떠날 용기도 없었고, 이렇게 무모하고 분별없이 나오는 태주를 문 회장의 입맛에 맞게 행동해 달라 설득할 여력도 안 남았다. 그러나 음성만은 꼭 찾고 싶었다. 태주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게 현명했다.
하아. 무거운 숨을 몰아쉰 차영이 힘겹게 입술을 벌렸다. 음성은 축 가라앉았다.
“사고 당일 경비행기 내부 음성이 그쪽 외할아버지한테 있다고 들었어. 아마 인근 관제소랑 교신했던 음성 녹음본이거나 아니면 잔해에서 발견된 기내 녹취 파일 같아. 그게 필요해.”
차분하게 차영의 대답을 곱씹던 태주가 의아한 듯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런 게 있다고? 확실해?”
“문 회장이 그렇게 말했어.”
그의 외할아버지가 그렇다니 전말을 모르는 차영으로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단지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인간에겐 누구나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가능한 한 긍정적인 결말을 도출하려는 본능이 있었다. 차영에겐 그게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거라도 있다면 제 슬픔이 아주 조금이나마 희석될 것 같았다.
“일단,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찾으면 연락 줘. 그때까진 우리 얼굴 안 봤으면 좋겠다.”
제 용건을 모두 마친 차영이 일방적으로 먼저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태주가 본능적으로 붙잡았다.
“이거 놔.”
태주의 체온이 제게 닿는 게 미칠 듯 가슴 설레고 마냥 떨리던 때도 있었으나, 이젠 순진했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일었다.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뒤 대체로 그랬듯 차영은 또 다시 그의 손을 밀어냈다.
“차영아.”
“내 생각은 확고해. 우린 헤어졌어.”
“우리 헤어진 적 없어.”
“헤어졌어. 하지만 난 필요한 게 있으면 한 기장 이용할 거야. 이게 싫으면 나 도와주겠다느니 그런 소리 취소하고, 전부 관둬도 돼. 안 말려.”
아직 미세하게 물기가 남아 있는 속눈썹 위를 제 손등으로 씩씩하게 훔친 차영이 아연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주를 분명하게 직시했다.
“그리고 다신 나 함부로 만지지 마. 메스꺼워.”
태주에게 멀리 떨어지려 한 걸음을 더 물러선 차영은 뒤쪽의 비상구 출입문을 확인하고, 가겠다는 인사조차 없이 빠져나갔다. 태주는 황급히 쫓아나가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어 계단 위쪽을 힐끗 살폈다.
회장실 근방의 비상계단인데 이곳에 폐쇄 회로 카메라가 없을 리가 없었다. 자신은 괜찮지만 늘 외부에 노출되는 문제를 염려하는 차영에겐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비열한 수를 쓰기를 서슴지 않는 제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지도 눈에 훤했다.
보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내려온 길을 고스란히 거슬러 올라갔다.
* * *
관제탑은 언제나 그렇듯 분주하게 돌아갔다. 이 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든 아무런 관계없이 비행기는 저마다의 일정으로 떠오르고, 또 하강해야만 했다.
휴가를 떠나겠다고 했던 날 초췌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던 차영은 약속한 휴식일이 모두 지난 뒤에 그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난감한 몰골로 나타났다. 더 쉬어야 되는 게 아니냐면서 동료들이 그를 만류했으나 그곳이 그나마 안전하고, 또 안정적으로 느껴져서 일할 수 있다고 탑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이륙 직전인 비행기들의 개수를 가늠해 보고, 순서를 매기던 차영은 잠시간 모든 행위를 멈추고 화면만 응시했다.
“차영 선배, 한국 항공 이륙시키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안 하세요? 계속 홀딩 중인데.”
“아 응, 지금 활주로에 새 있어서. 조류 퇴치반 움직이고 있거든. 곧 할 거야.”
그가 대답하는 사이, 망원경으로 탑 너머를 내다보고 있던 탑장이 차영의 옆에 끼어들었다.
“제비 보이면 봄이고, 두루미 눈에 많이 띄면 겨울이고. 철새들도 참 힘들겠어.”
“아직 겨울도 안 왔는데 벌써 새 많이 보이네요.”
“올겨울 추울 건가 보다. 참, 조류 퇴치 전담 팀엔 연락했어?”
“BAT요? 방금 했어요. 드론 띄운다는 것 같던데요.”
차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교신이 들어와서 장비를 고쳐 쥐고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 「타워 들립니까. 한국 항공 901입니다. 계속 이륙 대기 중인데 활주로 정비 아직입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차영은 최대한 덤덤하게 업무적으로 내뱉었다.
「타워입니다. 한국 항공 901. 현재 활주로에 버드 스트라이크가 감지됐습니다. 항공기에 충돌하거나 엔진에 빨려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담당 센터에서 드론 띄워 퇴치 중이니 앞으로 3분만 더 이륙 대기를 명합니다.」
- 「...」
「한국 항공 901. 들립니까?」
- 「들려. 그냥 듣고 있었어. 듣기 좋아서.」
나지막한 음성을 들은 차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교신 장비를 내려놓고 옆자리의 후배에게 관제를 이어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차영을 탑장이 힐끗 보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어딜 가는지, 왜 갑자기 나가려고 하는지 묻지는 않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아마 자신에게 최근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쳐 모퉁이를 돈 차영은 완전한 혼자가 되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태주...’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되새기며 차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편의점에서 생수와 애완동물용 간식 몇 가지를 사 들고나온 차영은 건물 구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강아지가 차영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얼쩡거리는 털색이 비슷한 길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너도 이 동네 살아? 처음 보는데.”
고양이는 차영이 육포와 물을 꺼내서 주자 조금 먹는가 싶더니, 그가 털을 조금 만지작거리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배를 까서 내보였다. 이 고양이 역시 강아지처럼 이미 사람 손이 많이 탄 것 같았다. 둘 다 애교가 많았다.
“너희 둘이 눈 맞아서 결혼하면 안 되는 거거든? 이종 교배 뭐... 그런 거야. 원래 절대 안 되는 사이도 있거든. 아마 짐승이니까 본능적으로 알겠지만...”
강아지와 고양이가 저들끼리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차영은 문득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올해 겨울은 탑장의 말대로 좀 추울지도 모르겠다. 보통 여름이 더우면 겨울이 춥다고들 하는데 지난여름의 기상 뉴스들을 돌이켜 보면 꽤 무더웠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그는 고개만 슬쩍 돌려 제집의 건물을 쳐다봤다. 아버지의 음성을 구하게 되면, 저 집에서도 이사를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집주인이 태주인 것도,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될 것도 마음에 걸렸다. 터무니없이 저렴했던 전세는 자신이 운이 무척 좋았던 게 아니라 그저 태주가 기회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씁쓸했다.
“이사 가면 너희랑도 안녕이겠다.”
강아지의 복슬복슬한 털을 만지작거리던 차영은 순간 귓가에 이명처럼 소리가 길게 울려 깜짝 놀랐다.
〈네 옆에 사람 있다.〉
그는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늘 비행기를 타고 프라하로 떠난 이 음성의 주인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애꿎은 아스팔트 위만 물통으로 툭툭 내려쳤다. 한번 생각난 음성은 엔진이라도 단 양 끊임없이 이어져 떠올랐다.
〈넌 원래 정이 그렇게 많아?〉
〈착하고.〉
〈끌어안는 거 안 되면. 키스는 해도 돼?〉
다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산다.
누구나 자신들만이 특별한 것 같다는 착각에 쉬이 빠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연애는 안타깝게도 그들만 하는 게 아니며, 태주와 자신이 함께 영위한 시간은 그리 길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모든 기억은 흐려지고, 추억은 빛바래고, 감정은 퇴색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차영은 왠지 그의 근사한 중저음의 목소리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쉽게 잊힐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태주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 해씩 자랐다.〉
“어쩌라고.”
그간 잘 크는지 지켜봐 줘서 고맙다고 감동이라도 해야 돼?
“나쁜 새끼.”
태주의 음성이 사방에서 불꽃 터지듯 터져 댔다. 그게 괴로워서 혼자 툴툴거리던 차영은 결국 눈물이 날 것 같아 제 무릎 위에 푹 고개를 숙였다.


91화
프라하의 한 호텔 침대 위에 편안히 누운 태주는 심각한 궁리에 골몰하고 있었다.
“사고 음성이라...”
〈사고 당일 경비행기 내부 음성이 그쪽 외할아버지한테 있다고 들었어. 아마 인근 관제소랑 교신했던 음성 녹음본이거나 아니면 잔해에서 발견된 기내 녹취 파일 같아. 그게 필요해.〉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여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외할아버지나 안 실장도 그런 내색을 보인 적 없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그들의 입이 무겁고, 이런 죽음에 관한 사안은 다른 문제들보다 더욱 신중하게 해결해야 했으니 일부러 말을 아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러나 태주는 이런 단순한 접근은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제 외할아버지가 매우 치밀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몹시 결벽적인 성격을 지닌 데다, 또 오만하고 독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녹취 파일...’
태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좁은 경비행기 조종석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상상도는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 갔다.
사고 당시, 급박해진 이정욱 기장과 제 아버지는 짧은 시간 내에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누구도 그렇다고 증명해 주진 않았지만, 그 사고에 대해 나름대로 뒷조사를 해 본 태주의 짐작으로 해당 사고는 기체에 미리 뭔가 조작을 해 두었던 것일 듯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계기판에 이상이 있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에 걸맞은 긴박한 말들이 오갔을 테고, 그건 운이 따른다면 이정욱 기장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도 되어 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음성을 문 회장이 차영에게 건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만약 편집해서 의미 없는 부분만 건넨다손 치더라도 차영이 복원을 시도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벌써 20년이 넘게 지난 일이고, 그때의 관제 환경은 지금에 비해 첨단화돼 있지 않아 훨씬 열악했다. 만에 하나 당시에 교신했던 음성이 남아 있었다 한들 추후에 문제가 될 수 있는 모든 불씨는 이미 무조건 없앴으리라. 경비행기의 잔해에서 그게 발견됐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됐다. 기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항공 측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불가능했고, 있었대도 결국 어떻게든 파기했을 것이란 데 생각이 미쳤다.
태주는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려지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자신은 문 회장을 잘 알았다.
‘애초에 그런 건...’
없는 것이다.
차영을 통해 뭔가 얻어 내기 위해 그를 속이고,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문 회장의 뚜렷한 의도가 안 보였다.
그리고 100만분의 일의 확률로 그게 세상에 있다면, 대체 어디에 있을 것이냐는 의문이 함께 스멀스멀 그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금융 기관의 금고는 결코 아닐 듯했다. 여차할 경우 공권력의 눈길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치명적인 증거를 남의 손이 함부로 닿는 곳에 두지도 않았을 게 자명했다. 물론 그 남이라는 범주에 죽기 전까지 한 이불 덮고 산 아내나, 평생을 자신에게 충성한 수족마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오직 스스로만 믿는 문 회장에게 예외는 없었다.
“하, 뭐야 대체...”
태주는 초조하게 잇새를 곱씹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워 있던 그는 제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무심코 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자신을 은밀히 따로 불러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됐다. 어째서 여태까지 그날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쓰는 부부 침실 안쪽에 회장님이 개인적으로 쓰시는 간이 서재가 작게 만들어져 있다는 건 알고 있니?〉
〈그리고 그건 안 실장도 수행 비서들도 아무도 모르는 금고야.〉
그녀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문 회장의 입장에서 꽤나 중요한 물건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어떤 의미로든 말이다. 외할머니도 자신의 부군이 줄곧 그 공간을 비밀스럽게 여기는 것을 봐 왔기에 혹여나 손자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카드 키를 넘긴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음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곳이 가장 유력했다.
태주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몇 개 안 되는 저장된 이름들 사이에서 상단부쯤에 있는 성명을 바로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 네, 태주 선배.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말씀만 하세요. 저 지금 숙소라서 바로 갖다 드릴 수 있어요.
“홍선재, 너희 아버지 종로에서 일하신다고 그랬지.”
- 맞아요. 그랬는데... 선배 그쪽에 가실 일 있으세요?
“오래 일해서 발도 넓으시고.”
- 뭐 비슷한데...
“너희 아버지 도움을 좀 받고 싶어.”
- 도움요? 무슨 도움요?
“일단 사람이 필요해. 입 무겁고, 돈이면 아무 일이나 다 하청받아서 하는 사람.”
- 그런 건 솔직히 찾기 그렇게 어렵진 않을걸요? 우리 아버지 주변 사람들은 알부자 아니면 죄다 가난뱅이들이라.
“잘됐네. 전화로 할 이야긴 아니고, 너 일단 지금 좀 내 방으로 와 줘야겠다.”
다행히 선재의 도움으로 첫 단추는 잘 꿸 수 있을 듯했다. 태주는 일방적으로 명령한 뒤 전화를 끊었다.
* * *
오랜만에 본가 명부전에 들른 태주의 눈앞에 한 사람의 영정 사진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외할머니의 것이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어머니와 나이 차는 많이 나지만 꽤 비슷하게 생겼다.
부모 자식지간에는 핏줄이기에 닮고, 부부는 결혼을 하면 차츰 닮아 가기에 일가족이 결국 비슷비슷한 인상을 풍기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자신도 그 논리를 일부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언젠가 차영이 이 혈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게 생각났다.
불가능함을 태주는 알았다.
분향을 한 그는 뒤편의 수행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 현재 외할아버지와 안 실장은 본사 빌딩에서 회의에 매진하고 있었다.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이쪽으로 향하겠다는 연락을 넣었더니 자신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태주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전부 쳇바퀴처럼 잘만 돌아가 준다면 이 싸움에 승산이 꽤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대응도 적절하게 할 수가 있는 법이나, 그들은 오늘 태주가 이곳에 왜 방문하고자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기 어려울 터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한 태주가 돌아서려고 하는데 때마침 이곳에서 들릴 일이 거의 없었던 사이렌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태주가 의아한 듯 비서를 쳐다보자, 그가 초소형 무전기를 들고 보안 업체의 직원과 무선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명부전의 중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태주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하는 것이었다.
“도련님, 일단 여기서 나가시죠. 외부에서 저택 별채에 무단으로 가택 침입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울리는 건 그 경보음입니다.”
비서를 뒤로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거실의 넓게 난 창문 바깥을 둘러보았다.
타운 하우스처럼 조성되어 있는 본가 건물은 각각의 별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한쪽에서 구멍이 생기면 이곳 안채까지도 쉽게 침입이 가능했다. 그래서 일부러 본가 살림 예산 중 꽤 많은 비중의 액수를 투자해 건물 외부에서 두 겹, 세 겹으로 두꺼운 보안 체제를 유지했다. 워낙 보호막이 튼튼해서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경계선이 뚫린 적은 없었다.
무전기를 든 상주 경호 팀장이 보안 업체의 사람들과 저택의 경호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에게 혹시나 경비 체계에 이상이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상주 도우미들과 관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계단 위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던 태주의 눈엔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경호 팀장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보였다.
“도련님께선 안전한 안채에 잠깐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 오늘 일 보고서를 올려야 해서, 나머지 별채들을 직접 확인한 뒤에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네, 뭐. 저한테 어디 가는지 보고하실 거 없어요. 난 대충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그의 뒤편에 있던 수행 비서가 경호 팀장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태주는 비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서 완전히 거실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집 안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고요한 복도를 거닐었다. 외할아버지 내외의 침실은 현관에서 가장 가깝고, 여러 개의 방을 터서 제일 큰 곳이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태주는 가장 안쪽으로 거침없이 뚜벅뚜벅 걸었다. 역시나, 간이 서재일 법한 침실 안의 출입문이 보였다. 제 외할머니가 남겨 준 하나의 카드 키로 그 안에 들어가는 데까지는 무척 쉬웠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쪽 서재는 업무용으로만 겸해 둔 공간인 모양인지 별채 서재에 비해 책이 많지는 않았다. 주변을 쓱 둘러본 태주는 나머지 하나의 카드 키를 만지작거리면서 더욱 안쪽으로 진입했다.
고급스러운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그리고 그 아래에 납작한 금고가 있었다. 역시나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대로 카드 키와 비밀번호 두 가지의 이중 보안 시스템이었다.


92화
〈회장님이 아무리 꼼꼼하셔도 결국은 나 같은 옛날 사람이잖니.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것들은 보통 네다섯 차례 시도를 넘기면 도리어 단단히 문을 잠가 버린다. 기회가 얼마 없는 셈이다. 최대 다섯 번 내에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노회한 문 회장이 사람들이 흔히 쓰는 주민 번호나 본인의 생일, 혹은 창립 기념일 또는 이런 것들을 조합한 단순한 번호로 안전을 도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드 키라는 다른 보안 장치가 있으니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워도 본인에게는 접근성이 좋아서 결코 까먹지 않을, 그런 수준의 쉬운 번호일 터다.
신중하게 제 손을 뻗은 태주는 카드로 먼저 잠금을 해제했다. 번호를 입력하는 판에 불이 들어왔다. 여섯 개를 누르면 되는 듯했다.
제일 먼저 항공의 날을 눌러 봤다. 삑. 장치는 문을 열기를 거부했다.
그다음엔 한국 항공의 첫 해외 취항일을 눌러 봤다. 역시나 삑, 하고 기계음이 들렸다.
기회도 얼마 안 남은 데다, 다시 직원들이 안채까지 올라올 때까지 시간도 거의 없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태주가 ‘설마 이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제 아버지의 기일을 눌러 봤다. 삑. 불행인지 다행인지 틀렸던 모양이다.
‘남은 건 두 번.’
손아귀를 한번 꽉 쥐어 본 태주가 빨간불이 반짝이면서 빛을 발하는 번호판 위를 응시했다.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 주기적으로 비밀번호를 바꿀 가능성도 있어. 그러면 이렇게 예전 일이 아니라 최근에 인상적이었던 날짜일 수도...’
잠시 망설이던 그는 손가락을 달싹이다가 자신에게는 익숙하지만 어쩌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법한 날짜를 입력했다. 태주가 한국 항공 조종간을 잡고 첫 비행에 올랐던 날이었다.
띠릭. 덜컹거리는 개방음을 낸 금고가 아가리를 활짝 벌렸다.
“하...”
망할.
어이가 없는 태주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겨우 황망한 정신을 수습한 그는 안을 뒤졌다. 옛날 사람답게 수기로 작성한 종이들이 더러 있었고, 외할머니의 전언대로 금전적 값어치를 할 만한 물건들은 안 보였다. 아마 누군가에겐 그것보다 더한 가치일지 모르지만, 실제 별반 돈은 안 되는 것들이리라.
그 안엔 납작한 상자도 하나 있었다. 거기에 든 낡은 편지 봉투는 어머니가 직접 수기로 쓴 듯한 필체들이 귀엽게 적혀 있었다. ‘아빠께’라는 단어를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가 직접 써서 제 아버지에게 드렸던 것을 여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사진 몇 장도 보였다. 개중 하나는 그의 눈에도 낯이 익었다.
가장 행복하게 웃고 있는 이걸 영정 사진으로 쓴 모양이었다.
애써 고개를 저은 그가 더 안쪽으로 손을 더듬어 보는데, 뭔가 묵직한 물건이 두 개가 잡혔다. 윤곽을 매만져 보던 태주는 흠칫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니 둘 다 검은색 물체였다. 하나는 오래전에 사용했던 영상 장비 기기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제 총기였다. 태주의 눈에도 꽤나 익었다. 이탈리아 베레타사의 자동 권총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실탄이 담겨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급작스럽게 떠오르는 오래전 기억으로 그는 숨이 턱 막혔다.
이것은 아버지가 사망하던 날, 태주의 침실에 무단으로 침입했던 문 회장이 그의 이마에 겨누었던 총기와 같은 모델이기도 했다. 어릴 땐 이것의 정체를 명확하게는 몰랐으나,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기억을 더듬으며 집요하게 여러 가지 총기들을 찾아다니다가 자연스럽게 베레타의 가장 유명한 모델인 92 시리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것들이 차영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가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듯했다. 기척은 아주 멀고, 또 희미했지만 워낙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느껴졌다.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었고, 그랬으면 하고 태주도 간절히 바랐으나 인간의 직감은 때로 제 능력 이상의 일을 거뜬히 해내곤 한다.
황급히 판단을 내린 태주는 그것들을 챙겨서 재킷 안쪽에 숨기고 재빨리 금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른 건드린 물건이 있는지를 침착하게 확인한 뒤 간이 서재를 빠져나왔다.
침실을 벗어난 그가 복도를 거닐어 나오니 정원 관리사들과 상주 도우미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이 뜬금없이 복도에서 튀어나오는 태주를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했다.
정황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의혹의 당사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뻔뻔함과 당당함이다. 그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이 사실을 직접 체득해 왔던 터라 그 누구보다 잘 깨우치고 있었다. 태주가 그들 중 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콕 찍어 요구했다.
“아주머니 저 차 한잔 주시죠.”
“어, 네 도련님. 뭘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아니, 회장님이 자주 드시는 걸로 주세요.”
“이렇게 쌀쌀하고 흐린 날엔 끝 맛이 쓴 쑥 차를 자주 드세요.”
“그럼 그걸로 할게요.”
재킷 안쪽에 툭 튀어나온 부분이 너무 눈에 띄었다. 오늘 소동이 있던 터라 이곳의 보안 장치들을 안 실장이 반드시 돌려 볼 것이다. 그나마 안채는 그런 기계 감시의 눈에서 안전했으니 정원 땅을 밟기 전에 여기에서 무조건 수습을 하고 나가야 했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던 도우미들이 태주가 주문한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라며 황급히 보낸 수행 비서와, 경호 팀장이 안채로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태주의 앞에 나란히 서서 꾸벅 인사했다.
“뭐였습니까?”
태주가 묻자, 수행 비서가 경호 팀장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자리를 좀 비켜 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서의 입이 열렸다.
“좀도둑이었습니다.”
“좀도둑? 이 동네에 그런 게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네요. 간덩이가 부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에 넘겼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 언짢게 듣지는 마십시오. 제가 조금 전에 이 일을 안 실장님께 바로 보고드렸더니 안 실장께서 도련님께 이렇게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사람들 눈 돌려서 안채에서 뭘 찾으시려던 겁니까?”
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군대처럼 위계 서열이 확실한 그들은 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이 집의 관리인 중 총 책임자 격인 안 실장에게 제일 먼저 보고가 들어가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엄연히 주인인 제 외할아버지가 따로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예리한 안 실장은 오늘의 이 사건이 아주 조악한 냄새를 띤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으리라.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면 되겠네요.”
“도련님.”
“아마 당신은 절대 못 찾을 겁니다. 외할아버지가 안 실장한테도 꽁꽁 숨긴 거거든요.”
“...”
“...라고 안 실장한테 전하세요. 개는 그냥 개의 일이나 하면 됩니다. 냄새 맡았으니 본인 할 일은 끝난 것 같다고요.”
아마 안 실장이 이 말을 전해 들으면 무척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태주가 찾고자 한 그게 무엇일지 무척 궁금하지만, 제 외할아버지에게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안 실장이 절대 못 찾을 무언가’라거나 ‘안 실장에게도 숨긴 어떤 것’이라는 둥의 언급을 하는 순간부터 문 회장은 안 실장이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는지를 추궁하기 시작할 테고, 또 그는 안 실장에 대한 신뢰를 일부 무너뜨릴 터다. 문 회장은 그런 냉정하고 혹독한 사람이다. 그러니 태주가 방금 한 대답은 안 실장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물론 그도 여태까지 문 회장과 함께해 온 세월이 있으니 침실 안쪽 서재에 뭔가 있으리라는 짐작 정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때론 궁금해하는 것 자체가 죄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지 태주도 궁금했다. 어차피 안 실장에게 제 몸을 수색할 권리 따윈 없었다.
“그렇게만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태주가 끄덕였다. 그사이 도우미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난 이 차 한 잔만 마저 마시고 출발할게요.”
“그러시죠.”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비서가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떨어져 묵묵히 대기했다. 태주는 품에서 차 키를 꺼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휙 던졌다. 반사 신경이 좋은 비서가 가까스로 팔을 뻗어 작은 물체를 낚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먼저 내려가서 차 열선 좀 올려 두세요. 날이 쌀쌀하네.”
그러고는 비서가 나가자마자 차를 조용히 음미하면서 동시에 도우미를 불렀다.
“아주머니, 전 이 찻잎 좀 챙겨 주시죠. 향이 아주 좋네요.”
“그거요. 역시 회장님이랑 입맛이 비슷하시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도련님.”
상냥하고 손이 빠른 아주머니가 고급스러운 쇼핑백에 찻잎을 챙겨 주었다. 태주는 굳이 불편해하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향이 그윽하고 맛은 씁쓸한 차를 입에 대면서 튼튼한 쇼핑백의 안에 손바닥보다 조금 큰 캠코더와 총기를 숨겼다.


93화
끼익.
난폭하게 운전을 하던 고급 세단 한 대가 도로변의 갓길에서 급히 멈췄다.
이 차량의 운전자인 태주는 쇼핑백의 안부터 서둘러 뒤져 뭔가를 꺼냈다. 총은 재킷 안주머니에 숨기듯 넣어 두고 제 손 위에 다른 하나를 올려 면밀히 살폈다.
이 물건이 영상 장비인 것은 분명했는데 딱 봐도 요새는 쓰지 않는 캠코더인 데다 너무 옛날 모델이라 어떻게 다루는지를 좀 헤매게 됐다. 무엇보다 전원이 안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차를 그곳에 버려두고 내렸다. 이미 본가에서 의미심장한 행동을 한 뒤였으니 최악의 경우 자신의 동선이 읽힐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갈아타는 것이 옳았다. 툭툭. 가볍게 차체를 내려치며 골똘히 방향성을 궁리하던 태주는 급한 대로 선재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목적지는 그가 있는 곳이었다.
- 선배? 일은 어떻게 됐어요? 잘 해결됐어요?
“그 사람들 경찰에 넘겼어. 그냥 시도에 그친 거니까 운 좋으면 훈방 조치 될 거고, 운이 나빠서 문 회장이 직접 처벌에 개입하면... 좀 안 좋을 수도 있다.”
- 감수하고 간 건데요. 한 큐에 그렇게 큰돈 벌기 어렵다는 거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수금 전까지 아버지가 돈 묶고 계시니까 조사 중에 쓸데없는 발설은 일절 안 할 거예요.
“해도 상관없어. 그 집에선 이제 용건 끝났거든. 어차피 이런 하찮은 눈속임을 본가 사람들이 모를 리도 없고. 본인 구명은 적당한 선에서 본인들이 하라고 전해.”
- 벌써 끝났다고요?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되게 스펙터클하게 사시네요.
“헛소리할 시간 없어. 다른 용건이 생겼어. 홍 기장 너희 아버지 가게 인근에 오래된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 있을까? 예전에 그런 뉴스 본 것 같은데.”
- 맞아요. 그 동네에 그런 거 많아요. 골동품점도 많고, 동대문 방향으로 좀 지도를 확장하면 훈장 같은 거나 옛날 전자 기기들 취급하는 데도 꽤 있고요.
태주는 결심한 듯 캠코더를 단단히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도로 앞뒤를 살폈다.
“잠깐 보자, 셋이서.”
- 지금요? 어디서요?
“너희 아버지 업장 주소 찍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차가 견인된다면 추후에 연락이 올 것이다. 급한 대로 지나가던 아무 택시나 붙잡은 그는 재빨리 거기에 올라탔다.
* * *
그가 도착한 곳은 선재의 아버지가 운영한다던 종로 일각의 금은방이었다.
태주가 약속한 시간을 살짝 넘겨서 택시를 타고 업장으로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선재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그를 마중했다.
“선배 오셨어요?”
“아버지는. 어디 계셔?”
“가게 안에 계세요. 선배가 좀 조용히 이야기했으면 하셔서 일찍 문 닫았어요.”
“오늘 손해 본 금액만큼 같이 사례할게.”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뒷문이에요.”
금은방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가게의 안쪽에는 쪽문이 나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있던 중년 남자가 그들을 발견하고 일어섰다.
선재의 수더분한 인상이 그의 안면에서도 고스란히 보였다. 태주가 그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자, 선재의 부친도 이에 질세라 똑같이 했다. 공손하게 구는 태주의 모습을 본 선재가 깜짝 놀라서 그와 제 아버지를 번갈아 살폈다.
“한태주입니다. 홍 기장 사수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선재가 엄청 따르고 좋아합니다. 지난번에 신세도 크게 졌다고 해서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었는데... 여긴 제가 일하다 잠깐 쉬는 쪽방이라 한 기장님 모시기에 너무 누추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해야죠. 오늘은 그런 일로 온 거 아닙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선재의 아버지는 태주를 향해 앉으시라 손짓했다. 태주가 앉자마자 그 앞에 본인도 자리를 잡았다. 선재가 두 사람의 사이에 심판처럼 앉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태주의 표정으로 미루어 꽤나 심각한 일임을 짐작하기 때문인 듯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캠코더를 올려 둔 태주가 맞은편으로 그것을 밀었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선재의 부친이 한번 만져 봐도 되겠냐는 듯 눈짓을 보내고는, 캠코더를 쥐었다. 그는 돋보기를 걸치고 물체를 360도로 돌려 가면서 신중하게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 진짜 옛날 모델이네. 요새는 이런 거 안 쓰지요.”
“연식이 얼마 정도 된 것 같습니까?”
“나도 기계는 서툴러서... 정확한 건 모르지만. 보아하니 우리나라 제품이 아니라 일본 내수용 같고, 한 20·30년은 됐지 싶어요. 까마득한 구형인데 크기도 작은 편이고 당시엔 아주 비싸게 구입했겠네요. 음, 가만있자... 이런 거는 일련번호가 있을 텐데.”
시기는 얼추 일치했다. 태주는 차라리 이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계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선재의 부친에게 차분하게 대꾸했다.
“만약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다면, 그게 뭔지를 알고 싶어요. 혹시 녹화된 영상물 같은 게 있으면 그 복사본을 만들어 주세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복제하는 사람이 영상의 내용은 확인하지 않아야 합니다.”
“글쎄요. 그게 가능한가? 한국말 알면 내용은 다 이해할 텐데.”
“그러면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으로 알아봐 주세요. 어렵겠지만 사례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장담은 못 드립니다만 일단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가 돋보기를 내려놓고 캠코더를 조심스럽게 뒤편의 수납장으로 챙겼다. 태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덧붙여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으세요.”
“최대한 빨리 알아보죠. 오늘 밤에 우선 쭉 돌려 보고 진행 상황 선재 통해 알리겠습니다.”
“제가 당부드릴 건 이 일을 반드시 은밀하게 진행해 달라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건 저를 위해서도, 아버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선재의 부친은 알겠다는 양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곳을 선재와 함께 빠져나왔다. 그때까지 내내 입을 앙다물고 말을 아끼던 선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게 대체 뭔데요?”
“나도 정확하겐 몰라. 어쨌든 네가 알면 다치는 거.”
“좀 오싹하네요. 기업인들끼리의 암투에 관한 증거, 뭐 그런 건가.”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게 제일 좋고, 뭐가 있다면 그런 내용인 편이 차라리 낫겠다.”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재주가 있으세요.”
“너도 나한테 저 캠코더 도로 넘기는 순간 그간 있었던 일 다 잊어버려. 자세하게 알 필요도 없고. 알수록 다칠지도 모른다고 아버지한테도 분명히 말씀드리고. 진짜로 저거랑 연루되면 크게 안 좋을 수도 있다.”
정답이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문제는 던져졌다. 그리고 어쩌면 곧 선재의 부친을 통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 회장이 그렇게 은밀하게 침실 안 서재의 금고에 보관을 해 뒀다면 아주 중요한 물품인 것만은 분명했다. 최소한 생전에 제 어머니가 그를 향해 마음을 담아 썼던 편지 정도의 가치는 지니고 있을 터다.
“크게 안 좋은 게 어느 정도일까요?”
“건드리면 패가망신하는 거지.”
선재는 농담을 다 하신다는 양 가볍게 웃었다.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이 말이 농담으로 들리는 네가 부럽다.”
“전 선배가 부러워요.”
“나 고아야. 어머닌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진 열 살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 그래도 부러워?”
“그래도 외조부님 계시잖아요, 어마어마한 재벌. 그건 고아가 아니죠.”
“그래, 그렇지. 계속 부러워해라. 그편이 네 정신 건강에도 좋겠지. 나는 불행하지만 누군간 행복해야 하지 않겠냐.”
“무슨 말씀이 그래요.”
대꾸 대신 허탈하게 웃어 보인 태주는 선재의 옆을 지나쳤다. 미리 불러 둔 택시가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재빨리 뛰어온 선재가 뒷문을 열어 주자, 태주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곤 올라탔다.
“선배, 모레 비행 때 봬요. 혹시 그 전에 복제되면 따로 연락드릴게요.”
대충 손을 휘저은 태주는 편안히 자세를 잡고 앉았다. 타악. 선재가 밖에서 문을 닫았다.
* * *
공항 터미널 일각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차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를 할 수가 있었다. 제복을 입은 승무원들 혹은 공항 도처에서 일하는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분류였고, 저마다 다른 크기의 짐을 이끌고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또 다른 한 분류였다. 분명히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자신은 전자에 속했는데 왠지 차영은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흐르는 물 위에 부유하는 의미 없는 물체 같았다.
때마침 도윤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해서, 차영은 휴대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그는 그녀가 주겠다던 어떤 물건을 받기 위해 터미널에 와 있었다. 도윤은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자연스럽게 짐작이 갔다. 아마 청첩장일 것이다.
친구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고, 또 그게 실제 제 심정이었으나 차영은 현재 마음속에 그녀를 온 정성 다해 축하해 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남자, 그리고 그와 자신 두 사람을 둘러싼 곤혹스러운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에스컬레이터는 차영을 위층으로 옮겨 주었다. 무심코 익숙한 방향을 따라 발을 내디디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예의 남자를 발견하게 됐다.
‘한태주?’


94화
아니나 다를까.
태주였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늘씬한 그는 언제 어디에서도 늘 눈에 띄었다.
제복을 입은 그는 같이 비행을 하는 부기장으로 짐작되는 젊은 남자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입이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였으나, 거리가 멀어서 목소리까지는 안 들렸다.
“헉...”
그가 서서히 제 쪽으로 접근했다. 당황한 차영은 자신도 모르게 카운터와 기둥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태주가 이곳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여태까지 한태주가 만든 억지 우연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공항에서 마주쳤던 일은 없었다. 이 커다란 공항이 그런 우연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차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결국은 없는 일과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다행히 그가 제 쪽을 못 본 모양이었다. 그는 캐리어를 끌고 차영이 선 자리를 그대로 지나쳤다.
“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차영은 그의 근사한 뒷모습을 훔쳐보듯 잠시 지켜보았다. 숨은 건 자신인데, 막상 그의 모습이 조금씩 작아지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미련을 제대로 털어 내지 못한 자신이 싫었다.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쉰 그는 휴대폰으로 절로 시선을 옮기게 됐다. 메시지에 답장이 없자 도윤이 전화를 걸어 왔기 때문이다.
“응, 도윤아.”
전화를 받으면서, 차영은 태주가 걸어온 반대편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터미널 도착했어. 보채지 마. 가고 있어.”
그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리고 차영이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도윤의 모습을 찾고 있을 즈음, 그와 정반대 편을 향해 걷고 있던 태주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뚝 멈춰 섰다. 태주를 따르고 있던 선재가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선배, 왜 그러세요? 뭐 놓고 온 거 있으세요?”
태주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먼 곳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의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돌아다니고 있는 분주한 장소였지만 늘 뒤쫓았던 실루엣인지라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차영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간을 좁혔다.
“선배?”
그제야 그는 대꾸 대신,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는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둡고, 고요한 암실에서 조용히 숨만 쉬고 있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스크린 화면을 켰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태주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화소가 흐리긴 하지만 분명한 색색의 화면을 담은 장면들이 재생되는 것을 보게 됐다.
상상했던 협잡 모의의 테이블을 촬영한 장면이라거나, 누군가의 약점이 될 만한 음험한 상황들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사고 직전의 음성 따위가 재생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평화롭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장소는 태주도 잘 알고 있는 본가의 정원 뜰이었다. 파티를 열고 있었던 모양인지 하얀색 테이블보를 뒤덮은 둥그런 원형의 테이블이 곳곳에 있었고, 그 앞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뒤편 무대 위의 어떤 젊은 여자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어머니?’
여자가 치는 곡은 생일을 축하하는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였다. 테크닉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아주 부족한 솜씨였다. 그러나 기세만큼은 프로가 부럽지 않았다. 신중하게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리고 있는 그녀가 제 어머니라는 것을 태주는 한눈에 알아봤다. 추측건대 문 회장, 혹은 그의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 같았다.
이윽고 몸을 살짝 튼 그는 그녀가 어설프게 피아노 치는 장면을 관찰했다.
앵글에 풋풋하고 정성스러운 애정이 가득했다.
살아 움직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다. 젊고, 아름다웠고, 싱그러웠다. 생생한 생동감과 경쾌함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목소리가 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주를 마친 그녀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갈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카메라가 있는 위치를 발견한 듯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곤 손을 흔들어 주었다. 화들짝 놀란 상대가 황급히 같이 손을 흔드는 모양인지 잠시 화면이 흔들렸다. 그 순간의 오묘한 두근거림과 설렘이 수십 년 세월을 넘어 전이됐다. 그리고 영상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이걸 찍은 건 누구지?’
태주는 가장 앞으로 영상을 돌렸다. 그러고는 계속 반복 재생할 것을 기기에 주문했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자니 그녀가 열중해서 입술을 살짝 내밀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다시 제 눈에 담게 됐다. 그러다가 영상 끄트머리에서 카메라를 빼앗긴 남자의 얼굴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안 실장이었다.
‘설마 안 실장이...’
그가 침묵한 채로 화면에 모든 주의와 집중을 기울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낮은 한숨을 토해 냈다.
“빌어먹을.”
차영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찾고 싶지 않았다. 제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치밀하고 꼼꼼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서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나 이 안에서 사고에 관한, 뒤로 무를 수 없는 증거들이 나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일었다. 그런 물증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자신이 억지로 붙들고 있던 차영과의 관계는 정말로 모두 끝이다. 그게 두려웠다.
모든 긴장과 걱정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태주는 편안하게 드러누웠다. 바짝 독이 오른 상태에서 첩보전이라도 찍듯 훔쳐 오고, 복제한 상황에 비하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라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는 괴롭다는 듯 제 이마를 팔등으로 짚다가, 불현듯 떠오른 물건이 있어 그것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베레타사의 총기였다.
총기의 탄환은 사용자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유통 기한이 결정된다. 이 안에 든 까마득히 오래된 총알은 여전히 사용 가능할 수도, 어쩌면 십수 년 전 진작에 폐기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애써 과거의 공포를 지운 덤덤한 얼굴로 총기의 슬라이드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금이 갈락 말락 하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매우 늦은 시간이었으나 상대는 곧장 음성을 들려주었다. 선재의 아버지였다.
- 네, 한 기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 아닙니다. 원래 새벽에 자거든요. 캠코더 영상은 아까 전에 선재 편에 받으신 걸로 아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실은 다른 용건이 생겨서요. 혹시, 탄환 같은 것도 구할 수 있습니까?”
- 탄환요? 진짜 총알 말씀입니까?
“네, 총기 제조사는 이탈리아 베레타고, 모델은 92F로 꽤 구형입니다. 그리고 만약 구할 수 있으면 이 슬라이드를 교체할 수 있나 여부도 궁금한데요. 좀 아슬아슬해 보여서요.”
- 음, 제가 그런 쪽으로도 문외한이라, 장담은 못 드리고. 일단 수소문은 해 보죠.
“부탁드립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간단한 통화를 마친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있는데 드르륵, 하고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재의 아버지인 줄 알았으나 그 위에 떠오른 이름은 제게 직접 전화를 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던 인물이었다.
[윤 원장]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제 외할아버지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원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중차대한 일이었다면 안 실장을 통했으리라는 생각이 2차적으로 들자 그럴 수가 없어졌다. 그는 화면을 종료하고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죠?”
- 태주야.
중년 남자의 음성은 푹 잠겨 있었다. 술에 취한 것 같기도, 괴로움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태주가 침묵하는 사이 상대가 간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 지금 좀 볼 수 있겠니? 꼭 할 말이 있다.
태주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시간에 전화를 한 데다가 심지어 나와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술주정으로 흘려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여태까지 윤 원장은 제게 이랬던 일이 없었다.
“거기가 어딥니까?”
- 여기가... 너희 아버지랑 가끔 왔던 술집인데...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더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섰다.


95화
태주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느 허름한 외관을 지닌 한 가게 앞이었다. 술집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다소 부족했다. 반주를 즐길 수 있는 밥집 정도라고 표현하는 편이 보다 나을 것 같았다.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태주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새벽인 데다 시간대가 애매해서인지 손님이라곤 그가 찾아온 윤 원장이 다여서 찾기 어렵지 않았다.
가장 구석에 있는 자리로 향한 그는 테이블 위에 상체를 늘어뜨리고 있는 윤 원장의 앞으로 가 앉았다. 평소 바르게 쓰고 있던 안경이 반쯤 흘러내려 콧잔등 위에 있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태주가 수저 함에서 젓가락을 하나 꺼내 슬쩍 눈 위로 올려 주자, 제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낀 윤 원장이 몸을 일으켰다.
“태주 왔구나.”
“이런 시간에 절 왜 부르신 거예요.”
“내가... 꼭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제정신이긴 한 겁니까?”
“어, 물론이지. 기다리고 있었다. 한잔할래? 네 아버지가 생전에 여길 아주 좋아했었어.”
“됐습니다. 차 가지고 왔어요. 하시겠다던 말씀이나 하세요.”
“그러지 말고.”
주인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윤 원장은 아주 오랜만에 들렀음에도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찬장을 열어 잔과 소주 한 병을 꺼내 왔다. 조그마한 잔을 태주의 앞에 놓아주고, 차가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투명한 소주를 그의 잔에 따라 주었다. 미간을 구긴 태주가 짜증스럽게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한 수 물러서겠다는 양 잔을 비웠다.
“너 네 아버지랑 어머니를 반반씩 닮았다. 알고 있지?”
“저 서두 긴 거 싫어합니다.”
“내 딸아이가 많이 아팠어. 너도 기억할 거야. 죽은 우리...”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태주는 그의 손아귀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비어 있는 제 잔에 술이 흐를 정도로 가득 따라서 또 단번에 전부 제 입 속으로 털어 냈다. 대충 그랬으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모든 악인에게도 저마다의 핑계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엄연히 피해자가 존재했고, 악인은 죄로 인해 취득한 이익이 있을 테고, 바뀌는 건 없었다.
“어쩌라고요. 같이 울어 드려요? 무슨 염치로 저 앉혀 놓고 그딴 소리 하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그 일에 가담했다.”
다시금 술병에 손을 대던 태주가 멈칫했다.
“안 실장은 당시 네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지만... 나는 짐작했지.”
아주 오래 고민하고 내뱉는 듯한 윤 원장의 말투에는 결연한 의지까지 조금 엿보였다. 조금 의외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스무 해가 넘도록 꽁꽁 숨기고, 감춰 왔던 비밀을 털어놓고자 할 때 그만한 결의가 있는 게 당연하게도 느껴졌다. 문제는 결심을 한 계기다.
“갑자기 이거 무슨 꿍꿍입니까? 외할아버지가 시켰어요?”
“그런 거 아니야.”
“지금 저 앉혀 놓고 뭐 하자는 건데요, 그럼.”
“네 말대로 죽은 내 자식 보기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다. 제대로 두 발 뻗고 잤던 적, 당연히 없었어. 그때 내가 했던 선택으로 딸아이가 몇 개월 더 연명하긴 했다만 결국 죽었지. 그게 꼭... 내 죗값 같아서 여태 내 입으로 그 일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
“그 경비행기 조종을 한 이정욱 기장의 시신 부검 소견서를 내가 썼다. 안 실장은 그걸 당시 과학 연구소 분소에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제출하도록 했고... 거기까지가 내가 관련된 부분이야. 이 기장에게도 슬하에 내 딸아이만 한 아이가 있었다는데.”
이번엔 태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윤 원장이 했던 대로 업소용 냉장고로 향했다. 거기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술병을 꺼내 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타악! 그가 한 손에 쥔 수 개의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까랑까랑한 마찰음이 침묵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차영입니다.”
“뭐라고?”
“이름이 이차영이라고요. 그 애 이름.”
“그랬구나. 차영이. 예쁜 이름이네. 지난번 본가에서 내가 진찰한 그 친구지? 그날 네가 차영이라고 불렀던 게 기억이 난다.”
“...”
“그 친구 아버지가 오래전에 너희 항공사에서 일하던 이정욱 기장이라고, 이달의 우수 기장인가... 그런 걸 자주 하는 재원이었다고 들었다. 충성심도, 애사심도 많았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안 실장에게 그런 사람 명예를 실추시키기보다는 좀 더 품행이 불량한 조종사도 있지 않겠냐고 되물었더니, 그 사람이 네 가지 근거를 들더구나.”
윤 원장이 제 왼손을 펼쳐서 태주에게 훤히 내보였다. 그러고는 개수를 세듯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평범한 사람일 것, 항공기 운항 능력이 출중할 것, 정치력이 부족할 것, 사건이 벌어졌을 때 도와줄 유력한 주변 인물이 없을 것. 그런 나약한 개인은 꼬리 자르기를 하면 그만이니 한국 항공도 큰 부담은 아니었을 거야.”
“힘없고 좋은 사람이었나 보네요.”
“그랬겠지. 네 아버지처럼.”
시종일관 덤덤하게 듣고 있던 태주는 가볍게 숨을 삼켰다.
“왜 이제 와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때 안 실장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 같은 개들은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나 충실히 하면 된다. 그러면 주인이 꼬박꼬박 밥을 준다... 덕분에 난 굶지 않고 밥을 먹고 살지만 죽은 내 아이에게 겸연쩍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태주야, 내가 뭘 하면 되겠니. 어마어마하게 늦은 건 알지만 이제라도 속죄하고 싶다.”
“뭘 하든 최악의 경우 아저씬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요. 외할아버진 기회 두 번 주는 분이 아니거든요. 또 아주 잔인하시죠. 그래도 뭐라도 하실 건가요?”
“나쁜 놈도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자기반성이라는 걸 하기도 해.”
짐작건대 얼마 전 본가에서 차영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됐던 일이 윤 원장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 같았다. 애써 당시의 일을 모른 척하며 살아왔으나 자신이 일부 가담한 죄의 희생양이 20년 후에도 문 회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으니 동요하지 않으면 인두겁을 썼다고 할 수는 없을 터다.
그러나 여태까지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던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단 한 순간의 충동이나 열정일지도 모른다. 뭐가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주는 술잔이 비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런 그에게 윤 원장이 덧붙였다.
“태주 너한테도... 정말 미안하다.”
협력은 할 수 있어도 용서해 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는 그는 이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 * *
새벽녘 야외 주차장에 얄팍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예정보다 무척 이른 첫눈이었다. 밖의 날씨는 쌀쌀하긴 했지만 눈이 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지나 해가 떠오르면 기온을 감당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녹아내릴 듯했다. 이미 조짐이 보였다.
아름다운 사계절은 이미 옛말이었다. 최근 한국의 기후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연의 섭리에 거스를 수는 없으니 맞춰 살아야 했다.
이른 시각 잠에서 깨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차영은 올겨울이 얼마나 추울까를 상상하며 제 몸을 떨었다. 그러다가 야외 주차장의 비어 있는 태주의 자리에 눈길을 주었다. 실은 처음에 창가에 설 때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너무 의식한 나머지 주변을 전부 둘러본 다음 겨우 시선을 던지게 됐다.
현재 시각은 새벽 4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어서 그런지 밝은 기운이라곤 하나 없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주광색 가로등이 없었다면 퍽 위험해 보이는 풍경이었을 듯했다.
커튼을 도로 치고 들어가려던 차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전화가 올 일이라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태주의 이름이 화면에 떠 있어서 몸이 굳은 상태로 잠시 보고만 있게 됐다.
제게 얼마나 급한 이야기를 전해야 했기에 굳이 새벽에 연락을 한 것일까.
힘겹게 심호흡한 차영이 차분히 눈을 감았다 뜨곤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너무 노력한 나머지 필연적으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 이차영 깨어 있었네. 나 술을 좀 마셨는데,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어서 걸었어.
바짝 긴장하고 있던 차영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아버지 사고에 관한 중요한 용건이 아니라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리 불러. 뭐가 문제야?”
- 올 때까지 기다릴게.
“미친 거 아니야? 아직도 내가 한 기장 운전기사 같아?”
- 기다릴게.
“한태주 씨.”
- 차영아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릴게. 너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꼭 취한 사람처럼 같은 말을 아주 느리게 반복했다. 덕분에 같은 자리에서 계속 돌고 도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렇게 조르면 자신이 와 줄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차영은 그의 뜻대로 따라 줄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든지 말든지 이제 나랑 상관없어. 끊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 내는데 한태주의 입에서는 나와선 안 되는 말들이 귓전을 울리는 바람에 멈칫했다.
- 넌 왜... 내 생각은 안 해? 너희 아버지 일 내가 그런 거 아니잖아.
그의 뻔뻔한 말에 음성이 히스테릭하게 터져 나왔다.
“하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 나는 너랑 똑같은 피해잔데. 너한테 그런 건 안 보여? 내가 누구 외손자인 건 보이고, 누구 아들인 건... 안 보여? 연좌제 같은 건 요새 세상에 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
- 대체 어째서 네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도, 너를 제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나인 건데.
여태 살면서 화가 난다고 뭔가를 집어 던져 본 적은 없었는데, 난생처음으로 차영은 그런 충동을 느꼈다.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한태주도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주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은 술에 취한 그를 상대해 주고 있는 머저리 같은 자신이었다.
차영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힐난했다.
“몰라서 물어? 정말 너같이 이기적인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날 속였잖아. 나 등신같이 원수 외손자랑 눈 맞아서 자는 머저리 만들었잖아. 심지어 내가 대 줬어. 이제 내가 아빠 얼굴을 어떻게 봐? 나 지금 너 죽여도 시원찮아.”
- 그러니까 와 줘. 기다릴게.
“아무런 논리도 없어. 그냥 해 달래. 내가 그걸 왜 해 줘야 돼?”
-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린다는 말만 몇 번을 하는 거야.
입술을 달싹이던 차영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안 가.”
- 기다릴게.
“분명히 말했어. 안 가. 알아서 정신 차리고 귀가하는 게 좋을 거야.”
뚝. 제 할 말만 마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한 차영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받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재차 걸어 오는 그의 집요함이 두려웠고, 또 한편으론 차마 휴대폰을 끄지는 못하고 있는 자신 때문에 답답했다.


96화
소리만 무음으로 하고 전시물처럼 소파 위에 그것을 올려 둔 차영은 계속 불을 밝히는 휴대폰 화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위에 뜬 태주의 이름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기계가 꺼지는 것처럼 제 마음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가 수천 번의 부재중 전화를 남긴다손 치더라도 자신은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하... 제발 그만 좀 걸고 빨리 집에 가.”
시간은 강물처럼 빠르게 흘렀다. 1분은 5분이 되고, 그 5분은 금세 10분이 됐다. 마침내 통화를 마친 지 30분이 넘어갈 때까지 태주는 한숨도 쉬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어 댔다. 덕분에 배터리도 통화 전에 비해 훨씬 닳아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도 포기한 모양인지 화면이 차츰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두움으로 점철된 그 위를 직시하던 차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그의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태주 진짜.”
이대로 두면 동이 틀 때까지 같은 행동이 반복될 것 같았다. 신경 끄면 그만이었으나, 그가 전화를 거는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휴대폰만 쳐다보던 자신의 상태로 미루어 그게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차영이 하는 수 없이 도로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연결됐다는 걸 인지한 태주가 차영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 차영아...
“미치겠다, 진짜. 이 개새끼야, 지금 어딘데!”
휴대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고정한 차영은 겉옷과 차 키를 챙겨 들고는 신발을 구겨 신었다.
* * *
집까지 오는 길에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정말 안전하게 모셔다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 태주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에게 익숙한 지상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6시가 넘어 있는 시각이었다. 아직 아침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는데 간밤에 살포시 대지 위를 덮고 있던 눈은 거의 녹은 상태였다.
차영이 그대로 태주를 두고 내리려고 하자, 그가 손목을 붙들었다.
“놔. 나 출근 준비해야 돼. 모시러 가고, 여기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으면 됐잖아.”
“널 돕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지금 그 사람 만나고 오는 길이야.”
뿌리치고 나가려던 차영이 멈칫했다. 그제야 태주는 제 몸을 제대로 일으켜 세워 똑바로 앉았다. 술을 꽤 마신 게 분명했으나, 그의 눈은 조금도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 여기가 어딘지,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본인을 둘러싼 제반 상황 일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혀 취하지 않은 것이다.
“한 기장 안 취한 거였어?”
“안됐지만 나 술 세. 말술이야.”
“뭐 이런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 새끼가...”
“취했다고 한 적 없어. 데리러 와 달라고 했지.”
그는 꼭 이런 교활한 방식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어디가 편해? 밖은 좀 위험하고.”
그러면 안은 안전한가? 차영은 순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멀쩡히 자신의 집에 있다가 느닷없는 불청객들이 제 사적 공간에 침입해 차영을 끌고 갔던 게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냥 여기서 해. 그게 누군데?”
“네 집에 나 들어가는 거 싫어? 그럼 내 집도 괜찮아.”
“둘 다 싫으니까 그냥 여기서 하라고.”
그가 지그시 차영을 직시했다. 큰 슬픔 속에 원망이 일부 담겨 있어서 차영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쪽에서 별말 덧붙이지 않고 용건을 이어 가기에 차영도 애써 덮었다.
“윤정훈 원장이라고, 의사야.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람이 너희 아버지 부검 소견서를 작성했어.”
태주가 말한 한 글자, 한 글자를 귀담아듣는 차영의 손이 떨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진실에 접근하게 된 느낌이었다.
마치 뇌 안을 반으로 가르고 그 틈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최대한 덤덤하게 대꾸하는 목소리 끄트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국과수 직원이야?”
“그건 아냐. 어쨌든 작성을 그 사람이 했고, 그걸 과학 연구소 중 한 분소에서 올린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서... 중간에 그만한 힘을 가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개입했겠지.”
“그게 한 기장 외할아버지겠네.”
이 물음에 태주는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차영의 앞에서 문 회장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둘 모두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국은 너희 아버지 시신에서 알코올 성분이 나왔다는 소견서를 경찰청에서 증거로 받아들였어.”
“그 사람이 뭘, 뭘 도와줄 수 있는데.”
“글쎄. 나도 아직 구체적인 건 생각 중이야. 양심선언 정도겠지. 시간도 너무 흘렀고.”
차영은 발끈했다. 조바심이 인 나머지 목소리의 데시벨과 주파수가 한꺼번에 높아졌다.
“사람 바보 취급 하지 마.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안 변해. 그러다 문 회장이 그 선언을 뒤집으려고 심한 짓이라도 하면? 죽은 아버지는 더한 수렁에 빠지게 만들고, 나랑 엄만 지금보다 더 끔찍한 지옥으로 처박히게 될 수도 있어. 한 기장, 내가 바라는 건 그냥 아버지 육성이야. 거기서부턴 그걸 지지든 볶든 내가 알아서 할게. 그거나 구해다 주고 우리 관계도 끝내.”
“이차영, 정신 차려. 그런 건 없어.”
절박하게 애원하다시피 하던 차영은 뻣뻣한 고개를 겨우 돌려 태주를 쳐다봤다. 그의 말투가 예외나 이변이라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양 너무나도 단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차영도 머리로는 그가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인정하기 어려웠는지 모른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차영의 이런 심사를 이해한 건지, 태주가 설득하듯 차분하게 덧붙였다.
“넌 우리 외할아버질 잘 몰라. 언제 자기 목을 졸라 올지 모르는 그런 찜찜한 물건 세상에 남겨 두실 분이 절대 아니야.”
“하지만 본인 입으로 나한테 있다고 말했어. 허튼소리를 할 사람으로도 안 보였어.”
“속지 마. 멍청하게 굴지도 마. 네가 믿을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야. 문 회장은 얼마든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네 앞에서 너 벗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아, 네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날 속인 것처럼?”
“차영아! 제발... 이 문제를 조금만 더 냉정하게 봐.”
태주는 어울리지 않게도 정말 간절한 음성으로 애원했다.
“확실한 건 아니잖아. 존재할 수도 있는 거 아냐?”
바짝 약이 오른 차영은 애써 단호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눈썹은 육안으로 훤히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리고, 호흡은 서서히 거칠어졌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감기라도 걸린 양 목 넘김마저 아프고 썼다. 가능한 의연하게 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데, 자꾸 분한 마음이 감춰지질 않고 이곳저곳에서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듯 조금씩 흘러나왔다.
“없어. 내 판단을 믿어. 그리고 만에 하나 네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존재한다고 하면 넌 그걸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경찰에 알린다? 안 실장 꼬리 정도나 잘려서 처벌되겠지. 그 사람은 그냥 끄나풀이야. 그냥 개야. 본인 의사라는 게 없다고. 네가 잡고 싶은 게 안 실장이야?”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라도 사람들이 알게 되고, 자신과 어머니도 편해지는 길을 도모하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아버지가 생전에 원했던 공항장으로 다시 장례를 치러 줘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의 단면에 얼마나 부조리한 부분들이 많은지 아는 차영은 이게 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납득하고 있기도 했다. 또 용기가 없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하늘이 도와서 재수사라도 할 수 있게 된다 한들 수사 기관이 선량한 시민들의 편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자신은 한 사람의 개인이고, 상대는 대기업 총수와 그 수하들이었다.
차영은 겨우겨우 제 마음을 다잡았다. 숨을 몇 번 차분하게 내쉬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진 알아듣겠어. 그게 세상에 없으면... 나도 더는 한 기장이랑 볼 일 없어.”
“기다려.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무슨 이야기. 대체 나더러 이 마당에 뭘 어떡하라고! 그냥 좀 나랑 끝내 주면 안 돼?”
버럭 소리친 차영의 눈가에 순식간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울컥 치민 화를 더는 억누를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이 문제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괴로운데 태주까지 계속 자신을 들쑤시며 못살게 굴어 힘들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어디에다 토로하지도 못했다.
대체 누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것인가.
처음 태주에게서 시신의 소견서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한껏 토해 내고 싶었던 눈물을 줄곧 참았더니, 한꺼번에 급박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한번 터진 둑은 물을 내보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태주가 서럽게 우는 차영을 빠르게 알아채고 달래 주려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동시에 차영이 필요 없다는 양 태주의 손을 야멸치게 밀어냈다.
“다신 나한테 손대지 말랬지. 너 역겹고 끔찍하다고 했잖아. 내 말이 우스워?”
그는 원망스럽게 태주를 쏘아봤다. 그러나 태주도 참다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나랑 같이 최선의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 왜 네 머릿속엔 날 버리는 것밖에 없어?”
“이 마당에 우리가 계속 사귀고 머리 맞대서 아이디어 쥐어짜는 게 정상이야?”
“나한테 정상 비정상 따질 정신 있었으면 네 앞에 안 나타났어. 너 나 외로워 보인다 그랬지. 슬픔이 많아 보인다고! 나도 널 보면 같은 걸 느껴. 대체 왜! 넌 내가 적이라고만 생각해? 내가 외할아버지 손자라서? 네가 아버지한테 일어난 일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할 때부터, 난 일평생 그 사람을 원망하고 증오해 왔어. 우리 아버지도 그 경비행기에 타고 있었으니까!”
순간 가슴이 철렁한 차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전 통화를 할 때도 그가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었고, 차영은 계속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하면 될 걸 이 시간에 그를 찾아 꽤 먼 길을 떠났다 돌아왔던 터다.
“이차영, 대답해 봐. 어째서 네가 제일 먼저 버리는 게 자존심이나 네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같은 피해자인 나야? 내 주위에 너 말곤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전부 되어 주겠다고 했던 건 너잖아!”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의 말은 본인의 입장만 생각한 너무나 불합리한 논리다. 물론 자신의 미움이 그 사고에 관한 한 결백한 태주를 가장 크게 겨냥하는 건 그에게 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차영은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애초에 사랑한 적 없던 사람과 적용하는 죄의 기준이 다른 게 합당했다. 자신이 태주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를 가장 냉정하게 처벌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하...”
태주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실선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들의 어깨 위를 날카로운 침묵이 에워쌌다.


97화
먼저 입을 연 건 태주였다.
“윤 원장이 진실을 밝히는 데 협조하기로 했어. 네 아버지 누명 정도는 풀 수 있을 거야.”
“언론은 한 기장 편 같아?”
“당연히 내 편이 아니지. 윤 원장이나 내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언론이 바로 기사를 실어 줄까? 아니, 나라면 이 일을 보도하기 전에 먼저 한국 항공 회장실에 메시지를 보내겠어.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이걸 얼마에 살 건지 묻기 위해서.”
“...”
“나 외할아버지 양자로 들어갈 거야. 그러면 언론도 내 편이 되겠지.”
깜짝 놀란 차영이 흠칫했다. 여태까지 태주는 제 외할아버지를 향한 적대감을 극명하게 표시해 왔다. 그의 입으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무리 인생에서 한 가지를 얻기 위해 그에 필적하는 가치의 한 가지를 내려놓아야 한다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 평생 증오한 사람의 후계자로 입적하겠다는 결심은 좀 납득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한 기장 제정신이야? 나한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이래도 난 그쪽한테 안 돌아가.”
태주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번번이 까먹는 거 같은데, 말했지, 우리 아버지도 그 경비행기에 타고 있었다고. 문 회장이 원망스러운 건 너뿐만이 아니란 뜻이야.”
“하지만 양자로 들어가는 거 끔찍해했잖아.”
“진실을 밝히는 일은 나한테도 아주 중요해. 어렵게 기회가 왔는데 놓칠 이유 없고, 또 방법이 하나뿐이면 난 얼마든지 그 역겨운 짓을 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너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마. 나한테도 너 아직 내 인생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돈 아니야. 난 너랑 같이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거지, 혼자 죽고 싶은 게 아니라고.”
“...”
“그냥 이건 너를 향한 내 감정과는 별개로 내가 슬픔을 털어 내는 방식이야. 너를 살리고, 그런 다음 나도 살아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 슬픔을 전부 털어 낼 수 있는데?〉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은 걸까.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차영이 그를 또렷하게 직시했다. 진의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려는 듯 선하고 단정한 얼굴에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그걸 마주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쉰 태주가 덧붙였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올라가 봐. 나도 오후에 비행이 있어서 쉬어야 돼.”
아주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차영은 결국 차에서 조용히 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혼자 남겨진 태주는 조수석 의자에 편안히 기대 누워 가볍게 눈을 내리감았다.
조금 전 차영이 했던 말이 뒤늦게 사무쳤다.
〈이래도 난 그쪽한테 안 돌아가.〉
정말 어떻게 해도 우린 안 되는 건가?
이렇게까지 해도, 넌 날 봐 줄 생각이 없다는 거야?
언젠가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에 약속해 주겠다고 기꺼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던 차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그냥 모르는 척하고 그에게 매달릴걸. 나중에 모든 걸 알게 될 차영이 얼마나 괴로워하게 될지, 힘들어하게 될지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저질러 버릴걸.
그때 그냥 단단히 약속을 받아 내고 그를 가졌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 * *
언제나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 무렵이 되면, 문 회장 안가의 침실에는 그의 아내가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안경을 쓴 채로 그날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 전부터 이 방에는 늘 문 회장 혼자였다.
약간 허전함을 느낀 그가 티 테이블 위에 두툼하게 쌓인 종이 신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침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기척을 내자,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른 시간부터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나타난 안 실장이었다.
“안 실장이 이 시간에 안가에는 무슨 일인가? 부른 적 없는 것 같은데.”
“회장님께 따로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이르게 찾아왔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래. 앉아.”
안 실장은 그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충신이었다. 오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났다면 그에 상응하는 중요도를 지닌 사안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문 회장이 그를 향해 제 앞에 앉으라는 양 손짓해서, 안 실장도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잡았다.
“말해 봐.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무례인 줄 알면서도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지난번에 도련님께서 본가에 방문하셨다는 보고를 드린 바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기억해. 좀도둑이 들어오려고 했었다는 날 말이지?”
“네, 수상쩍은 괴한들의 침입 시도가 있었습니다.”
“경찰에 인계했다면서. 보안 시스템은 다시 체계적으로 점검하고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무척 외람되지만 그게 도련님이... 사주한 사람인 것 같다는 의견도 함께 말씀드렸습니다.”
이 지역은 대기업 총수들이 많이 거주하는 부촌 중의 부촌이었다. 방범 기구들이 삼엄할 정도로 착실하게 제 역할을 했고, 각각의 저택에서 보안에 들이는 정성과 비용도 막대했다. 덕분에 이 부근은 절도 범죄율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낮은 동네에 속했다. 그래서 안 실장은 이 보고를 하던 당일에도 뭔가 의아한 부분들이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문 회장에게 설명했었다.
“그건 이미 다 했던 이야기잖나. 그래서?”
“회장님께서는 이상한 점을 못 느끼시겠습니까?”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눈을 돌릴 만한 필요가 있었던 거겠지. 이 집에서 나오는 동전 한 닢 가져가기 싫어하는 놈이 찻잎 말고 진짜 원하는 걸 잘 찾아갔는지 모르겠구나.”
“회장님.”
“이 문제를 걸고넘어져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털어놔 봐. 혹시 이 집에 네가 훤히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리나?”
안 실장은 이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 회장이 말을 덧붙였다.
“안 실장, 아니, 진석아. 네가 나한테 보이는 충성을 내가 안다. 그러니 모든 일을 믿고 맡기고 있잖니. 이 안에 네가 모르는 공간은 있지만 그건 네가 몰라도 되니까 만든 영역이야. 그러니 쓸데없는 호기심은 품지 마. 그게 현명하다.”
벌떡 일어선 안 실장은 문 회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마.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어. 다만 난 모두에게 단 두 번의 기회만 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됐으니까 이만 나가 봐.”
“그리고 회장님, 나가기 전에 한 가지 더 꼭 말씀드려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문 회장이 그를 힐끗 살폈다.
“저... 윤 원장이 도련님을 따로 만났답니다.”
고급스러운 금테 안경을 천천히 벗어 내려놓은 문 회장이 다시 앉으라는 듯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안 실장은 신중한 태도로 그의 앞에 다시 마주 앉았다.
* * *
한국 항공 본사 빌딩 회장실에 제복 차림의 태주가 찾아왔다. 비서진은 그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으나, 그는 쳐다봐 주지도 않았다. 그들이 안 실장에게 태주의 방문을 보고하기도 전에, 그는 막무가내로 회장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안에서 문 회장은 안 실장의 서면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저 왔어요.”
태주가 한마디 하자 안 실장이 눈치껏 뒤쪽으로 빠져 섰다. 태주는 그가 문을 닫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모양새를 힐끗 살피고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라야 회의용으로 마련된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그는 결이 부드러운 소파를 만지다가, 문 회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노회한 노인은 그런 태주의 행동이 지닌 의미들을 파악하기 위함인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만 볼 따름이었다.
“왜 왔는지 안 물어보세요?”
“제복까지 갖춰 입고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공항으로 가기 전에 드라이브도 할 겸 외곽으로 빠졌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그렇게 운전을 계속 직접 해야 되겠니? 기장들이 너처럼 운전 자주 하는 거 봤어?”
“기사 붙여 주시게요? 뭐 어디까지 감시하고 싶으셔서요.”
못마땅한 듯 태주를 쏘아본 문 회장이 어투를 부드럽게 바꾸고 화제도 변경했다.
“어디 비행이니?”
“멀리 가요. 크로아티아.”
“안전 운항 해야겠구나. 올해까지만 하고 사직하겠다는 의사 전했다면서. 잘 생각했다. 그만두면 곧바로 회사로 들어와.”
“아뇨, 저 계속 하늘 날고 싶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좀 더 일선에 있고 싶어요.”
“좀 더 있고 싶다?”
“회사를 물려받는 건 아직 시기상조 같다는 소립니다. 경영 수업이라곤 받아 본 적도 없고. 그 자린 외할아버지가 좀 더 버텨 주시죠.”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지만, 문 회장의 눈길은 미묘했다. 태주도 그걸 눈치챘으나 그 부분에 관한 한 말을 아꼈다. 어쩌면 지난번 태주가 본가에서 뭔가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것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지난 새벽 윤 원장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문 회장과의 대화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좀 더 버텨 달라. 오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는구나. 마음이 바뀐 거니?”
태주는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고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회한 문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입적시키는 대신 제 부탁도 한 가지 들어주세요.”
“일단 말을 해 봐.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이러는 꿍꿍이가 뭔지.”
“차영이 문제입니다.”
“이 자리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구나.”
“다시는 건드리지 마세요.”
“건드리지 말아 달라.”
“외할아버지가 차영이한테 손 뻗으신 거, 저 길들이고 싶어서라는 거 압니다. 그러니까 서로 필요한 거 하나씩 주고받죠, 공평하게. 있지도 않은 음성 같은 걸로 걔 흔들지도 마시고. 다신 찾지도 마세요. 그리고 저 차영이랑 안 헤어져요. 구질구질하게 붙잡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필요하시면, 네, 아들 삼으세요.”
두 팔을 책상 위에 겹치고 턱을 괸 채로 태주를 보던 문 회장이, 천천히 자세를 고쳤다. 그는 내선 인터폰 버튼을 눌러 비서실에 급히 연결했다. 곧바로 안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회장님.
“태주 입양 문제로 꾸려 둔 변호인단들을 당장 사옥으로 불러. 혹시 지금 이 자리에 태주가 필요한가?”
-아뇨, 바로는 인감 정도면 됩니다. 추후에 공증할 때는 계셔야 하고요.
“그래. 그러면 약속을 태주 비행 후로 잡으면 되겠구나. 크로아티아라니까 운항 팀에 이 녀석 일정 내 쪽으로 보고하라고 연락해 둬. 그리고 안 실장 넌 다시 들어와.”
명령을 마친 문 회장이 내선을 종료하자마자 태주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노크 후에 문이 열리고 안 실장이 나타났다.
“절차 준비 다 되면 사람 보내지 말고 그냥 전화하세요. 제가 이쪽으로 오죠.”
대답도 듣지 않고 안 실장을 지나친 그는 뭔가 크게 불편한 표정을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수행 비서들이 임원 전용 승강기를 붙잡아 두고 있다가 태주를 안내했다. 딸칵. 그의 뒤편에서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98화
그리고 그가 빠져나간 내부에서는 태주가 있는 동안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문 회장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안 실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태주 출국한 사이에 집이랑, 보유하고 있는 차에 전반적으로 감청기 설치하고. 앞으로 누굴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사람 붙여서 꼼꼼하게 감시하게 해라. 크로아티아면 며칠은 거기서 머물 거야. 그동안에는 태주 그놈이 누구랑 통화하는지, 국내에선 윤 원장 동선 꼼꼼히 살피고. 무엇보다 이차영이... 그 아이 계속 눈여겨보고 있어.”
“그러겠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 뻔해. 내 외손자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자발적으로 내 밑에 들어올 놈이 아냐. 지금 분명히 사고 칠 준비하는 거야. 말 바꾸기 전에 입양은 최대한 빨리 진행해.”
“알겠습니다. 기자 회견도 공증하시는 날로 함께 준비할까요?”
“저놈이 그런 거 하려고 들겠어? 최대한 빨리 자리만 마련해. 내가 하는 편이 나을 거다.”
테이블 위의 달력에 고정됐던 그의 시선이 금세 집무실 블라인드를 쳐 놓은 창 쪽으로 향했다. 눈치껏 안 실장이 블라인드를 한껏 올리자 주변 빌딩과 멀리 겨울을 맞이한 숲, 그리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 따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태주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을 때가 됐다. 여태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녀석이 뭐가 진짜 무서운 건지를 잘 모르지.”
겨울은 문 회장에게 소중한 딸을 빼앗아 간 참혹한 계절이었다. 부디 올겨울이 태주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고 다만 많은 것들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문 회장은 의자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으며 혀를 쯧, 하고 찼다.
* * *
공항 인근의 한식당이 여느 때와 같이 공항 직원들로 붐볐다. 드문드문 아는 얼굴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관제탑의 직원들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탑장이 충동적으로 식사를 사겠다며 마련한 자리라 예약을 하지 못하고 왔더니, 안쪽 객실은 이미 만석이어서 외부의 테이블 좌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테이블들의 정중앙은 길게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화면이 엄청나게 큰 모니터가 마치 조각상처럼 위용을 자랑하며 위치했다. 각자 메뉴들을 주문하고 밑반찬들을 한 입씩 맛보고 있는데 예의 모니터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와 시선이 집중됐다.
점심 뉴스에 대영 그룹의 문현기 회장이 긴급 기자 회견을 한다는 소식이 송출되고 있었다. 찰칵찰칵. 셔터가 사방에서 미친 듯이 터지는 게 눈으로도 보였고, 귀로도 전해졌다. 문 회장의 얼굴이 잠시 번쩍거리더니, 이내 좌중의 취재진들을 진행 요원들이 자중시켰던 모양인지 온전한 본인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는 국민 앞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보통 저런 기자 회견은 준비된 메시지를 전부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미리 문서로 할 말을 정리해 오기 마련이었으나, 그는 종이 한 장 없이 단상에 올랐다.
[저한테 요절한 여식이 있다는 건 많이들 아실 겁니다.]
마치 죽은 딸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최대한 표정을 정리하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는 그 딸아이가 남기고 간 귀한 손자가 하나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제 외조부모가 뭘 하는 사람들인지, 부담 느끼지 말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라는 뜻에서 조용히 키웠습니다만 아내마저 먼저 보내고 나니 노욕을 부리게 됩니다. 다행히 손주 아이가 동의해 주어서 정식으로 입양 절차를 밟으려고 합니다.]
그게 태주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식당 안의 사람들이 죄다 웅성거렸다.
[몇 차례 언론에서 보도했다시피 우리 한국 항공에서 조종간을 잡고 있는 한태주 기장이 제 외손주가 맞습니다.]
화면 속의 노인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인이 항공사에서 직접 일하며 직원들의 애로 사항은 무엇인지, 승객들의 요구 지점을 우리들이 얼마나 맞춰 갈 수 있을 것인지 몸으로 부딪쳐 가며 하나하나 배워 가는 중입니다. 이제 정식으로 입적을 시켜서 일을 더 자세히 가르쳐 볼까 합니다. 앞서간 아내의 유언에 따라 한국 항공 기념 재단에 이름을 가장 먼저 올릴 예정입니다. 부족하겠지만 차근차근 공부하게 해서,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이 사회의 밀알이 될 요긴한 인재로 만들겠습니다. 부디 어릴 때 부모를 여읜 그 아이를 예쁘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한 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본사 차원에서 미리 언론사에 자료를 제공했던 모양인지 문 회장과 태주가 장례식장에 같이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화면에 이어졌다. 여태까지 철저하게 얼굴만큼은 감춰 왔으나, 이제는 드러내 놓고 태주의 증명사진까지 함께 전파를 탄 지경이었다. 서늘한 인상의 몹시 유려한 얼굴이 차가운 눈길로 모니터 너머를 직시하고 있었다.
해당 뉴스 꼭지가 지나가고, 사건 사고에 관한 기사들이 이어지자 관제탑의 직원들도 테이블 위로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간 공항 사람들 사이에서는 파다하게 돌던 소문이지만 실제로 뉴스와 같은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 접하는 것은 현실감에서 차이가 있었다.
“어우, 저 영악한 노인네 너무한다. 그래 봤자 평생을 금수저인데 어릴 때 부모 여의고 이런 이야기는 굳이 왜 해? 불쌍해 보이고 싶나?”
“심리전 아니에요? 어르신들은 부모 어릴 때 여의었다 그러면 안타까워하잖아요. 갑자기 어린놈이 툭 튀어나와서 경영 전선에 뛰어든다는데 반발 잠재우기죠, 뭐. 말투도 공식적인 자리인데 시종일관 엄청 불쌍한 척하고 수가 너무 보인다.”
“먹히니까 그 수 쓰는 거지. 그런데 그냥 데려다 밀알인지 일꾼인지로 쓰면 되지 징그럽게 입양은 왜 해? 자기 입으로도 노욕이라고 인정했으면서.”
“아무래도 성씨 때문 같지 않아요? 하나뿐인 손자한테 문 씨 주고 싶어서?”
“일리 있네.”
직원들이 한마디씩 보태는 동안, 차영은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다.
저들에겐 일상 속에 약간의 충격적인 사건일 뿐이지만 차영에게는 달랐다. 지옥 같은 현실이었다. 덕분에 그는 멍하니 앉아 문 회장의 음성을 듣는 내내 마치 땅속으로 꺼져 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몸은 갯벌에 빠진 듯 자꾸만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데, 그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 갈 길만 열심히 가는 듯한 극한의 외로움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아무리 ‘구해 줘’라고 목구멍이 찢어져라 소리쳐도, 전혀 들어 주지 않는다.
아마 지금쯤 자신과 같은 기분을 실감하고 있을 법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슬픈 일이지만 태주를 생각하니 필연적으로 문 회장의 기자 회견 발언이 귓전에 재생됐다.
‘다행히 손주 아이가 동의해 주어서 입양 절차를 밟으려고 한다’라고?
한태주를 절벽으로 몰고 간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차영은 알 길이 없었다.
노회한 문 회장의 얼굴을 곱씹듯 되새기던 그는 순간적으로 목구멍을 타고 역한 기운이 역류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탑장을 비롯한 동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아졌지만 어떤 해명을 할 겨를도 없었다.
입을 틀어막았는데도 이미 터져 나온 기침이 잦아들질 않았다.
“차영 선배!”
“차영 씨!”
결국 차영은 뒤편으로 들리는 동료들의 음성을 무시하고 빠르게 화장실 방향으로 뛰어갔다.
“욱...!”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빈 칸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속을 게워 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뒤쫓아 온 듯한 누군가가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구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금세 탑장이 음성을 들려주었다.
“왜 이래, 이차영. 괜찮냐? 한 술도 못 뜨더니 구토까지 하고. 어제 술 마셨어?”
“식사 중에 죄송... 윽...!”
“야, 차영아!”
“탑장님 저 죄송한데... 그냥 혼자 있을게요. 욱! 우욱...!”
아침 식사를 걸렀던 터라 나오는 건 별반 없었다. 끊임없이 시큼한 위액만을 게워 내게 됐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토해 내고 싶은 것인지 계속 위가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험한 꼴을 보이는 게 싫어서 탑장을 밀어내고 문을 닫은 그는 한참이나 괴로워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탑장이 차영의 의사를 배려해 걸어 나가는 소리까지는 인지할 수 있었다.
헛구역질까지 수차례 거듭한 뒤라야 겨우 그의 입도 목도 쉴 틈을 벌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쳐 보니 이 날씨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지친 차영은 변기 뚜껑을 닫고 걸터앉았다.
“하, 으... 미치겠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제복을 입고 있는 증명사진 속 태주의 모습과, 장례식장에서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슬픔에 잠겨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지워지질 않았다.
별도리가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해하는 사람과 결탁하려 하는 그가 불쌍했다.
그러기에 왜 그런 인간 외손자로 태어나서 위로해 줄 수도 없게 만들어.
여전히 차마 그를 안아 줄 엄두가 안 나, 차영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99화
또다시 언젠가와 같은 장면의 반복이었다.
정기 검진을 핑계로 윤 원장의 병원에 방문한 태주는 제 앞에 도열한 의료진들에게 힐끗 눈길을 던졌다. 윤 원장을 중심으로 하여 부원장과 전문의들이 백색 가운을 입고 나란히 서 있었다. 수개월 전 왔을 때보다 인원이 훨씬 더 늘었다.
당연한 이치였다. 이곳은 한국 항공의 제1 협력 병원이고, 자신은 이미 문 회장이 기자 회견을 통해 전국구로 못을 박은 덕분에 명실공히 그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미간을 구긴 태주가 그대로 말없이 나가려는데, 윤 원장이 여느 때처럼 뒤를 따랐다.
“한 기장님. 저랑 같이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이제 외부는 좀 쌀쌀할까요? 원장실보다는 밖을 더 편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물끄러미 윤 원장을 돌아본 태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 원장은 두 사람을 뒤쫓아 오던 의사들을 전부 물리고, 혼자서 태주를 건물 바깥으로 안내했다.
중앙 병동 산책로에는 한껏 냉랭해진 공기의 영향으로 거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윤 원장을 알아본 환자와 가족들이 인사를 하면, 그도 귀찮아하는 내색 없이 상냥하게 잘 받아 주었다.
인공 호수가 조성되어 있는 주변은 물기 때문에 온도가 조금 더 낮은 탓인지 산책로 중 가장 고요했다. 주위에 인적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한 윤 원장은 벤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고는 뒤편의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왔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몸이 안 좋아질 것만 같은 달콤하고도 쓴 커피를 조용히 마셨다. 반쯤 비운 컵을 들고 전방을 주시하던 태주가 순간 어떤 소리를 느끼고 뒤를 확 돌아보았다. 인기척인지, 단순히 바람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눈앞에 사람이 안 보이긴 했으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쪽에 CCTV 없는 거 맞습니까?”
“없다.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왜 확신하세요?”
“얼마 전에 점검을 했으니까. 네가 이번 검진 땐 다시 이쪽으로 올 것 같았어.”
납득할 만한 해명에도 태주는 미심쩍어하는 기운을 동공에서 감추지 않았다. 그런 그를 힐끗 관찰한 윤 원장이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주 너한텐 아직 두려운 게 많구나. 다행이다.”
“기분 나쁘게 에둘러 말하지 마세요.”
“그건 잃을 게 있다는 의미야. 꼭 지켜야 할 것, 소중한 가치. 그런 게 있다는 거지.”
순간 차영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태주는 애써 천천히 지워 냈다. 지금은 최대한 이성을 차리고 냉정하게 판단을 해도 모자란 중차대한 분기점이었다. 괜히 감정적으로 굴게 돼 일을 시작도 하기 전부터 그르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래, 나한테 기회를 줄 마음이 생겼어?”
“윤 원장이 외할아버지 사주받고 절 회유하려는 게 아니란 걸 어떻게 믿죠?”
“아내가 아파.”
그녀는 태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집안끼리 교류할 때 얼굴을 봤던 적이 있었다. 외동딸이 태생적으로 여러 장기가 부실하게 태어나 줄곧 아팠던 탓에 일도 그만두고 병간호에만 전념하던 게 기억에 남았다. 덕분에 얼굴에 감추지 못한 그늘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는지 상상이 잘 안 갔다.
“아이 죽고 나서 이혼하지 않으셨어요?”
“했지. 피차 얼굴을 보면 죽은 아이 얼굴이 떠올라서 괴롭기만 하니까. 하지만 그 여자를 보호하고 싶은 의도도 한편으론 있었다. 난 어차피 검은 물에 몸을 담근 사람이고, 살다가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거야. 그래도 연락은 꾸준히 하고 지냈어.”
“얼마나 안 좋으신 건데요.”
“오래 마음을 졸이고 살아서 그런가... 심장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더라. 그래서 난 이제 다 털어 내고 아내가 있는 나라로 가고 싶다. 남은 생 정도는 같이 살게.”
지금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러 가지 원인이 기폭제가 되어 그가 용기를 낸 이유는 납득이 갔다. 윤 원장의 말마따나 그는 이제 꼭 지켜야 할 것이나 소중한 가치들이 점점 사라지고 두려움이 많이 잦아든 상태이리라. 끝까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윤 원장은 제 딸과 오랜 친구 중 피붙이 쪽을 선택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지금 마음은 이렇듯 선의로 가득 차 있으나 또 금세 다른 소중한 것을 핑계로 태주의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본능적으로 그걸 우려하게 됐다. 다만 지금의 태주는 이 알량하고 다라운 양심마저 간절한 게 사실이었다.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서, 악역한테 소명할 기회 같은 건 안 줘요. 아저씨가 그때 왜 그러셨는지, 어째서 이제야 마음을 바꾸시게 됐는지 저한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영영 용서하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제가 지금 뭘 가릴 때가 아니라 도움은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우리 아버지 친구였던 아저씨한테 어떤 제안을 드릴 거예요. 듣고 본인 생각 말씀해 주세요.”
“해 봐라.”
“혹시 그 사고에 관한 증거 같은 거 가지고 계세요?”
윤 원장은 대답할 말을 고르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응당 이런 방향에서 출발하리라고 짐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아마 너도 짐작하겠지만, 그땐 옛날이고, 스마트폰이나 메신저 같은 것도 없었고. 서신이나 전화 통화 같은 건 증거가 남을 수도 있어서 회장님께서 워낙 미덥지 않아 하셨다. 그래서 안 실장과 실제로 몇 번 밀실에서 만나 대화한 게 다였지. 내가 작성해서 보냈던 소견서는 그게 원본이라 내게 남아 있지 않고, 연구원 분소 같은 데 자료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 부분은 인맥 동원해서 한번 알아보마.”
“증거가 남아 있다면 그걸 토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아저씨가 공개 증언을 하시는 거예요.”
“공개 증언?”
“살인 모의가 있었다는 걸 증언하시면 돼요. 그날 저도 본 게 있고 기억하는 게 있으니 그 자리에 당연히 함께할 겁니다. 다만 이제 살인 사건은 공소 시효가 사라져서, 아저씬 처벌받으실 수도 있어요. 본인이 말 꺼내신 거니까 약간의 참작 정도는 되겠지만... 뭐, 수감이라도 되면 그 안이 목숨 보전하는 데는 더 용이할지도 모르겠네요.”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고, 살인을 직접 교사한 것도 아니니 검경은 검사 결과의 조작이나 살인 교사를 방조한 혐의 정도만 그에게 물을 터다.
윤 원장도, 태주도 그가 실질적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공권력이 아니라 이 일로 타격을 입게 될 문 회장의 사적 권력이라는 것을 익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 노회한 인사가 어떤 치밀하고 파괴적인 방어전을 펼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 증언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갈 것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현실은 새하얀 눈의 세상이 아니다. 도리어 그 위를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서 밟고 지나가서 새카매지고, 질척거리게 된 더러운 거리 쪽에 가까웠다. 그 위에 다시 새하얀 눈을 열심히 뿌려 본대도 다시 처음의 하얀색으로 돌이키는 건 불가능했다.
“외할아버지하고 척지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저 여태까지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본인이 받은 건 어떻게든 되돌려 주는 분이라서요.”
윤 원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다.”
“구더기 안 무서우세요?”
“그래도 장은 담가야지. 나도 두 다리 뻗고 제대로 잠들고 싶다. 일단 연구소에 내 자필 자료가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내가 증언할 문건은 직접 준비하마. 언제까지 마무리하는 게 좋을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언론이 쉽게 이런 예민한 문제 취재 테이블에 나와 줄까?”
“나올 만한 언론을 찾아봐야죠. 그거 때문에 입적 결심한 거기도 하니까요. 지금 생각으론 국내외 언론 도움을 같이 받아 볼까 해요. 그편이 효과적이지 싶네요. 시기는 다시 연락드릴게요. 아저씬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세요.”
“그렇겠구나. 알겠다. 그런데 너 아무리 미워도 네 외할아버지인데... 정말 괜찮겠어?”
“그 사람이 제 외할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날 이후로는’이라는 전제가 빠졌지만 태주는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니까 본인한테나 신경 쓰세요. 당분간은 위험한데 혼자 다니지 마시고요. 십중팔구 지금 우리가 밖에서 대화하고 있는 것도 회장님은 보고받으셨을 거예요. 호락호락한 분 아닌 거 아시잖아요.”
위험의 무게를 감지한 그들은 잠시간 침묵의 실을 짰다.
이제 더 나눌 대화가 없다고 느낀 태주가 먼저 일어섰다. 윤 원장이 따라 일어나려다가, 생각이 많아졌던 모양인지 다시 벤치에 앉았다.


100화
살짝 눈인사한 뒤 가려는 태주의 발목을 윤 원장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붙잡으려 들었다.
“태주야, 이런다고 뭐가 바뀔까?”
“아저씨가 앞으로 두 다리 뻗고 주무실 수 있겠죠.”
“너는?”
“아버지 앞에 떳떳할 수 있어요. 늘 나만 구차하게 살아남은 것 같아서 미안했거든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때 자신이 문 회장에게 했던 그 말과 그 순간의 굴욕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네 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면 엄청 화내겠다. 넌 아무 잘못도 없어.”
“그쪽 같은 비겁한 인간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비위 상해요.”
태주의 힐난 섞인 대꾸 후에 이어지는 응답은 없었다. 윤 원장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일에 엄청난 반향은 없을지도 모른다. 전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도리어 역공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 공론화는 모든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긴 했다. 특히 차영과 그의 어머니에게 약간의 속죄 정도는 될 수 있을 터다. 진실을 알게 되는 일이니 말이다.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특별한 끝맺음 없이 제 갈 길을 갔다.
그리고 태주가 뚜벅뚜벅 걸어 나간 산책로 한 귀퉁이에, 윤 원장은 아주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 *
공항 인근 한 조용한 일식 요리집의 내부에는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이제 난방 장치를 가동하지 않고서는 날씨를 버티기가 쉽지 않은 계절이 본격적으로 도래했다. 안과 밖의 온도 차가 워낙 심해서 커다란 유리창에는 자꾸 김이 서리고 성에가 생겼다.
이곳은 공항 근처에 있는 몇 안 되는 고급 식당이라 기장들이 회포를 풀기 위해 가끔 출입하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제복 차림의 태주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바깥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던 인사였다. 태주가 몰래 회동을 요청하자 그쪽도 퍽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가 가진 권위에 억지로 이끌려 온 것일 수도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태주의 것과 똑같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입성했다.
“한 기장 먼저 와 있었네?”
태주보다 나이는 지긋하게 들었으나, 어깨의 견장은 그보다 한 줄이 모자란 세 줄이었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태주의 앞에 우뚝 섰다.
“오셨습니까, 권 기장님.”
“귀하신 분이 나를 이런 식당에는 왜 불렀을까?”
“일단 앉으시죠. 괜히 올려다보게 하지 마시고.”
서로를 못마땅하게 직시하고 있던 그들은 각자 필요에 의해 시선을 옮겼다. 권 부기장이 자리에 앉으면서 제 앞에 이미 풍성하게 차려진 값비싼 회들을 주시했다. 그러면 태주가 따뜻하게 데운 술을 그의 앞에 놓인 잔에 차분히 따랐다. 여태까지 태주가 조종석 안과 밖에서 보였던 권위적인 태도와는 다른 꽤 정중한 손짓이었다.
“징계 이후 처음 뵙나요? 저랑 권 기장님 운항 일정이 잘 안 겹치는군요.”
“운항 팀장도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우릴 같이 붙이려고 하진 않겠지.”
“그런가요?”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아. 칵핏 외부에서도 직급에 따라 존대 써야 하나? 아니면 한 기장이 한국 항공 물려받을 도련님이니까?”
“이래서 꼰대들이 싫다니까. 그냥 쫄리면 쫄린다, 쪽팔리면 쪽팔린다고 말을 하세요. 쓸데없이 센 척하지 말고. 어깨에 힘주면 떡이라도 나옵니까?”
확 열이 오른 권 부기장이 제 어깨를 움찔했다. 태주는 동요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날 왜 불렀어.”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가 너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데. 맛이라도 간 거 아니야?”
“‘너 때문에’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제 대응은 원칙하에 이루어졌던 거고, 그 기준이 좀 까다로웠을 뿐이죠. 모든 원인 제공은 권 기장께서 하셨습니다.”
“야, 한태주!”
그가 버럭 소리쳤지만 태주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저도 피차 감정은 안 좋습니다. 괜히 사내 게시판에 유언비어나 퍼트리시고. 저 한국 항공 입장에서 낙하산은 맞는데 경력상 따로 눈탱이 치고 들어온 건 없어요. 민항기 조종사 최소 비행 요구 시간 충족했습니다. 운항에 필요한 면장도 모두 보유하고 있고. 건강 상태도 무척 양호하고요.”
“너 이런 이야기 하자고 불렀냐? 왜, 이번엔 그거 핑계로 감봉으로도 모자라 아주 자르게?”
“겨우 그걸로 직원을 어떻게 잘라요. 그런 거 아닙니다. 권 기장 저 꼴 보기 싫어하시죠. 제 사직서 드리겠습니다. 기장 은퇴하시면 한국 항공 기념 재단에 자리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뭐?”
“권 기장이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요.”
지금 들은 말이 실제가 맞는지가 궁금한 듯했다. 어안이 벙벙한 권 부기장이 태주를 탐색하듯 훑어보았다. 태주는 제가 한 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잠시간 얌전히 있었다.
그사이 태주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물색할 때 윤 원장이 했던 말을 참고삼아 떠올리게 됐다. 안 실장이 차영의 아버지를 선택했을 때의 기준 말이다. 그가 집중한 것은 첫 번째 화두였다.
평범한 사람일 것.
얼핏 권 부기장은 태주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나쁜 선택지라고 판단할 법도 했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맨 처음 권 부기장과 크게 갈등을 빚었을 때 다른 승무원의 실수를 알면서도 자신이 다 안고 갔던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자신이 한국 항공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비토했던 상황들을 아울러 떠올렸다. 진짜 냉정하고 욕심만 득시글득시글한 사람이라면 권 부기장은 그때부터 태주에게 주눅이 들어 지금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는 못했으리라. 그가 쉽게 감정에 이끌리는 부분에 기대자는 판단이었다.
“부탁? 무슨 부탁. 네가 왜 나 같은 사람한테 부탁을 해. 무슨 수작이야?”
태주는 이곳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적은 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에게 거짓을 말할 수 있었다. 속일 수도 있었다. 덕분에 어떤 이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권 부기장의 마음만은 확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싫어하는 게 확실한 권 부기장의 마음만이 태주에게 믿을 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권 기장 같은 아저씨한테 왜 수작을 부립니까?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그런 나한테 부탁을 하는 저의가 뭐냐는 얘기야. 너 문 회장 손자라면서.”
“어려운 일 아니에요. 하지만 문 회장은 할 수 없는 일이고요. 그냥 저 좀 도와주시죠.”
권 부기장이 일순 침묵했다. 차가운 시선이 태주를 향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란 게 뭔데? 들어 보고 널 안 보고 사는 일보다 귀찮은 게 더 클 만큼 복잡하거나, 재단에서 준다던 자리보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면 거절이야.”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남은 건 설득이었다. 권 부기장이 테이블 아래로 휴대폰을 스윽 내리는 모습을 태주가 꼼꼼히 지켜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상 아래에 걸린 권 부기장 팔뚝의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마 휴대폰 화면의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녹취 중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했지만 태주는 제지하려 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모른 체했다.
“쉽습니다. 다음 주 주말경에 공항 인근에 은밀하게 두어 시간가량 인터뷰를 응할 만한 장소를 좀 마련해 주세요. 언론사에 중요한 제보를 한 가지 할까 하는데, 제가 지금 어딜 가도 쫓아오거나 감시하는 눈이 있는 것 같아서 장소 마련이 쉽지가 않습니다. 짐작이지만 집이나 차에 감청도 당하고 있을 것 같고요.”
“감청? 너 요즘 뉴스에 종종 나오던데, 기자들?”
“아뇨. 뭐... 거기까지 아실 건 없고. 어쨌든 매일 소지하는 휴대폰 정도만 겨우 사수하고 있는데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서 뵙자고 했어요.”
“첩보전 찍냐? 퍼스트 듀티에서도 제 외할아버지랑 아주 영화를 찍더니?”
“가끔은 사람 성격 더러워지게 만드는 가족도 있는 법이거든요.”
“이거 나 엿 먹이려고 테스트하고 그러는 거 진짜 아니겠지? 사주 외손자?”
“이 일로 권 기장이 피해를 입어 봤자 업장 노 쇼로 욕먹는 정도밖에 더 됩니까?”
“너한테 음침한 꿍꿍이속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그가 이렇게 나오면 태주도 할 말은 있었다.
“솔직히 지난번 일도 그쪽에서 먼저 잘못하신 거 맞잖습니까.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지한 순간 바로 대처를 했어야죠. 말하기 불편하다고 해서 모른 척 버티고 있으면 일만 더 커지는 거 모릅니까?”
“...”
“난 권 기장 프로라고 여기고 있고, 그걸 모른다고도 생각 안 해요. 어린놈이 덤비는 게 열받으니까 뻗대는 거지.”


101화
“결국 탑승교에서 주먹다짐은 네가 먼저 시작했고, 네가 훨씬 더 때렸어.”
“그건 같은 조건에서 싸웠지만 제 완력이 권 기장보다 더 세서 그런 거고요.”
“넌 맞는 말을 하는데 왜 항상 이렇게 기분이 나쁘냐?”
〈맞는 소릴 해도 한 기장처럼 싸가지 없이 하면 들어주기 싫어.〉
그럴지도 모른다.
태주가 차영의 음성을 떠올리며 픽 웃자 권 부기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쪼개. 어?”
“전 남 인생에 크게 관심 없습니다. 권 기장이 기장 승급을 하든 나중에 인천 공항장이 되든. 잘되시면 그런가 보다 하고 못 되셔도 저랑은 상관없고요. 꿍꿍이 같은 거 품을 만큼 그쪽 삶에 애정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답이나 하세요. 어쩔 겁니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밥 먹으러 왔는데 계속 남자 둘이 머리 맞대고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요.”
“진짜 보복 인사 같은 건 없는 거지?”
“없습니다. 녹취하셔도 됩니다.”
태주가 힐끗 테이블 아래 휴대폰을 턱짓했다.
“이미 했다. 주말이라고? 시간은 점심쯤이 좋겠네.”
그러자 권 부기장이 감춰 두었던 휴대폰을 태주를 향해 들어 보였다. 너무나 예상 그대로라 그는 픽 웃었다. 속이 너무 어두컴컴한 나머지 아무것도 안 들여다보이는 사람에 비해 이쪽이 훨씬 편하고, 신뢰가 갔다. 우스운 일이었다.
태주가 계약금이라는 듯 본인의 한국 항공 사직서를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권 부기장은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힐끗 확인하고는 제복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와 동시에 태주는 상다리가 휠 정도로 빼곡하게 차려진 차림을 전부 뒤로하고 일어섰다. 가볍게 묵례한 그는 권 부기장을 두고 그대로 객실을 빠져나왔다.
* * *
매일 밤, 혼자 거실의 벽에 서게 되면 으레 드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더 이상 개수가 채워지지 않고 있는 이 마그넷 판을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다.
‘스무 개가 넘네.’
괜히 마그넷 위를 손으로 더듬어 보던 차영은, 역시 이번에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게 됐다.
모니터 전원을 켜 놓은 텔레비전에선 오늘의 주요 기사들을 전달해 주고 있어서,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째 태주의 관한 이야기도 종종 들렸다. 다른 매개체도 아니고 공중파 저녁 뉴스를 통해 그의 소식을 이따금 전해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던 일이었다.
태주와 사귀면서 알게 됐던 것들보다, 요사이 알게 된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했다. 그가 앞으로 상속받게 될 대영 그룹의 계열사 지분은 그 총액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부터, 여태 무슨 학교를 얼마 만에 졸업했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조종사로서의 평판은 어떤지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기본 정보들을 꽤나 많이 습득하게 됐다.
[...뒤늦게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대영 한국 항공 측은...]
차영은 장례식장에서 찍힌 태주의 사진이 자료 화면으로 등장하자마자 텔레비전 화면을 꺼 버렸다. 그의 소식이 자꾸만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꽤 오래전에 기내에서 승객을 묶어 두었던 사건의 책임 기장이 그라는 사실도 다시금 회자되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 쪽에서 먼저 승무원과 다른 승객들을 폭행했던 분명한 현장 증거가 남아 있던 터라, 그가 기내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의견과 그래도 대응이 너무 감정적이고 과했다는 의견들로 갈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태주가 한 기업을 이끌 수장으로서 적합한지 자질 논란이 연일 불거졌다.
머릿속에서 태주를 비우고자 노력했지만 너무 가까이에 그가 있어서 쉽지 않았다. 무심코 그를 생각하던 차영은 거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쌀쌀한 겨울의 바람이 전신을 단단히 휘감았다. 그럼에도 차영은 테라스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저 안에 태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7층은 잠잠했다. 뒤를 돌아보니 주차장의 차량들도 얌전히 주차되어 있었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차영은 창가 문단속을 하고 겉옷과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마음속이 스산해서 가까운 곳을 차로 한 바퀴 돌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제 차 키 옆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태주의 집 카드 키를 눈에 담게 됐다. 이것도 매일 출퇴근길에 보게 될 때마다 언제쯤 돌려주어야 하나, 갈등에 빠지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거실 한편의 마그넷들처럼 말이다.
〈내 주위에 너 말곤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전부 되어 주겠다고 했던 건 너잖아!〉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들은 위로부터 내려온 악연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전우였다. 자신이 나약해서 문 회장에게 차마 갚아 줄 수 없는 울분을 그에게 풀고 있다는 것도 맞았다. 차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점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태도가 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차영은 빠르게 문을 닫고 집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때마침 승강기가 아가리를 벌려 사람을 토해 냈다. 계속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던 태주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태주는 제복 차림이 아닌 데다 캐리어도 없었다. 아무래도 운항 일정으로 외출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조금 전 저녁 뉴스를 본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던 차영이 침묵한 채로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묘하게 안색이 핏기 없이 파리해져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응당 지칠 만도 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앞으로는 도처에 이보다 더 그를 지치게 할 일들투성이일 터다.
누군가에게는 매일이 크리스마스라던데, 한태주에겐 매일이 악몽일지도 모른다.
“저기, 한 기장.”
망설임 끝에 차영이 어렵사리 그를 불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주 쪽에서 차영을 먼저 무시하고 지나치려 들었다. 왜였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는데도 차영은 재차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한 기장, 내 목소리 안 들려? 이 시간에 어딜 가는데.”
빠르게 걷던 태주가 우뚝 멈춰 섰다.
“신경 끄고 너 갈 길이나 가.”
그러고는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려고 하기에, 차영이 빠르게 걸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 갑자기 나한테 차가워? 뭘 잘했다고?”
“너도 하루아침에 나한테 차가워졌어.”
“진짜 적반하장도... 나랑 같아?”
“달라. 그런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나 원래 제멋대로인 거 잊었어? 비켜.”
“카드 키 가져가.”
그때까지 차영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던 태주가, 그제야 시선을 끌어 내렸다.
“왜 그걸 내가 가져가?”
“원래 한 기장 거니까.”
“난 너 준 거야. 그 순간부터 내 손 떠났어. 네가 안 쓸 거면 버려.”
“못 버리겠으니까 그렇지.”
“날 못 버리겠는 거겠지. 좀 솔직해지는 편이 낫지 않아?”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괜히 붙잡았다. 카드 키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대로 주차장으로 빠져나간 차영이 제 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뒤쫓아 온 태주가 강제로 문을 닫고 차영의 어깨를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우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아직 늦은 밤이 아닌 터라 주차장 입구 쪽에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멀리서 보면 대화 소리는 안 들리고 다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차영이 뿌리치려 했는데, 그는 완강하게 버텼다. 어깻죽지를 꽉 붙들고 있는 악력이 지나치리만큼 너무 세서 상체가 죄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저기 사람들 있는 거 안 보여? 놔.”
“이차영, 내가 빌어도 나는 안 돼? 다 포기하고 너랑 있겠다고 해도 안 돼? 평생 그 집 문턱은 드나들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꼭 날 버려야 속이 시원해?”
“놓고 얘기해. 아파!”
억눌린 분노로 흔들리던 태주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 색을 되찾았다. 차영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압통을 호소하자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그가 깊은숨을 몰아쉬다가, 차영을 놓아주었다. 차영이 제 팔을 살짝 움직여 가면서 통증을 완화시키는 동안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태주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 허전한 목에 둘러 주었다.
“이런 거 필요 없어. 차로 갈 거야.”
“집에서 차까지 이렇게 짧은 거리라도 맨살 드러내고 왔다 갔다 하면 추워. 감기 걸려. 이것도 난 너 준 거야. 필요 없으면 이따 집에 가서 버려.”
“한 기장.”
“갈 길 가라. 나도 갈 데 있어.”
차에 타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양 그가 한 걸음을 물러섰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오는 모양이었다. 태주는 바로 옆에 세워 둔 제 차 쪽으로 향했다. 차영은 태주가 자신을 등진 사이 그가 둘러 준 채도가 낮은 회색 머플러를 도로 풀어내려 했다.
그에게 그것을 돌려주고 차에 탑승하려고 했으나 강제로 다시 붙들리는 바람에 어떤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심각한 표정의 태주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차영에게로 다가와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102화
“왜 이래?”
순간 차영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그는 어떤 의미 있는 반응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을 하고 전화를 받을 따름이었다.
“네, 한태주입니다.”
- 태주니? 나 윤정훈 원장 와이프인데, 기억하지? 우리 한 20년 만인가? 더 됐나...
나지막하게 숨을 내쉰 그는 차영의 손목을 붙잡은 제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절박한 촉감에서 뜻 모를 불안이 전이됐다. 그래서 차영은 억지로 뿌리치는 대신 일단 얌전히 있었다. 그사이 태주는 침착하게 통화를 이어 나갔다.
“어쩐 일이세요?”
- 저기 지금 좀 중요한 통화 괜찮을까?
“혹시 윤 원장 때문이에요? 지금 연락이 계속 안 돼서 집으로 찾아갈까 했거든요.”
- 응. 맞아. 얼마 전에 그이가 이게 태주 네 번호라면서 뜬금없이 알려 주더니 본인이 일러 준 시간마다 규칙적으로 연락이 없으면 너한테 꼭 전화하라고 했었어. 혹시 거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너무 걱정돼서...
“아주머니, 제가 3분 뒤에 이 번호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태주가 상대에게 일방적인 양해를 구하곤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차영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야?”
“너 이 집 말고, 지금 당장 어디 다른 데 묵을 곳 없어?”
“무슨 일이냐니까? 방금 한 기장이 윤 원장 어쩌고 했잖아.”
“정 없으면. 구도윤 씨한테 며칠 신세 좀 지겠다고 해.”
“내가 왜...”
“설명할 시간 없어. 제발 알았다고 해!”
버럭 소리치는 태주의 눈빛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신경질적인 표정과 짜증스러운 태도였으나 지금의 그가 무척 절박하고, 또 필사적이라는 것은 차영에게도 너무나 잘 전달됐다.
차영이 말을 잃은 사이, 태주는 그의 차 키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제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것과 교환하듯 바꿔 주었다.
“갈 때 내 차 타고 가.”
“내 차 두고 왜 이래야 되는데?”
“만에 하나 네 차가 위험할 수도 있어서.”
“한 기장 건 안전하고?”
태주가 체념이 섞인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별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래도 최소한 불에 태우거나 교통사고로 위장하려고 차체를 들이받진 않겠지. 무엇보다 당장은 내가 타 있는 줄 알 테니까. 이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몇 시간 눈속임 정돈 될 거야.”
그의 말대로라면 예의 그 눈속임을 위해 제 차를 타고 갈 한태주는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정확히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차영은 등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 한태주. 잠깐만. 나 좀 이해가...”
“잠깐 같은 거 없어. 나만 말할 거야. 잘 들어 이차영. 지금부터 넌 한눈팔지 말고 구도윤 씨 집에 최대한 빨리 도착해. 그런 다음 내가 허락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마.”
아주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 때문에 차영은 현실감이 없었다.
“나 그냥 택시 탈게. 한 기장이 본인 차 타.”
“안 돼. 택시 안은 내 통제 구역이 아니잖아. 택시도 불안해. 이거 타.”
“하... 왜 이러는지, 이러는 원인이 뭔지. 그 설명은 안 해 줄 거야? 나 불안해!”
“미안한데 그건 나중에. 시간이 없어. 여기서 구도윤 씨 집까지 얼마나 걸려? 한 시간? 두 시간?”
“싫다니까!”
“차영아, 제발! 내 말 들어. 얼마나 걸려. 그거나 대답해.”
한태주, 하고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던 차영은 엄정하게 판결을 내리듯 자신을 직시하는 태주와 눈을 마주치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멀어. 걔 쉴 땐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본가로 내려가서.”
“도착해서 전화해, 기다릴 테니까. 그리고 너 가는 길에 연락은 전화보단 메시지로 하고, 통화할 필요가 있으면 차에서 내려서 해. 무조건, 반드시 사람들 많은 곳에서.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이해하지?”
“그래서 넌 내 차 타고 내 대신 들이받히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러지 않으려고 이렇게 하자는 거야. 너랑 달리 난 문 회장을 잘 아니까. 알아야 싸워서 이기지. 나 너무 불안하게 하지 마. 꼭 전화해.”
“한태주. 그래도...”
“걱정 마. 난 절대 안 다쳐. 말했지. 네가 믿어야 할 건 나라고. 나밖에 없다고.”
“한태주!”
“타.”
숙지해야 할 경고 사항을 한꺼번에 쏟아 내듯 내뱉은 태주는, 억지로 제 차에 차영을 태웠다. 운전석에 앉은 그가 창밖의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안전벨트를 하라는 양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핸들을 붙잡은 차영은 그를 뒤로하고 운전했다.
다른 때였다면 차영도 말을 듣지 않겠다고 억지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주의 저 반응으로 미루어 뭔가 무서운 일이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가 제 차를 타고 가게 두는 게 맞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에게 전권을 주고 상황을 타개하게 만드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건 알았다. 자신은 걸리적거리는 대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룸미러를 확인한 차영은, 통화를 하고 있는 태주의 모습을 힐끗 살폈다. 불안하지만 그를 보면 한편으로는 안도가 됐는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의 모습이 사라지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급한 대로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시간에 갑자기 연락해서 신세를 지겠다는 건 사실 무척 곤란한 부탁이지만 그녀라면 들어줄 것이다.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지듯이 내려놓고 운전을 하던 차영은 순간 제 턱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진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머플러를 돌려주질 못했다.
차영은 태주가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지게 되자 머플러의 위에 입술과 코를 묻었다. 그의 향기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키스를 못 했더라.
그런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입을 열면 뿌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완전한 겨울이 됐으니 다가올 봄이 기다려져야 했는데, 차영은 미래를 기대하긴커녕 당장 이 살얼음판 위를 어떻게 거닐어야 하는지 하루하루가 벅차기만 했다.
겨우 도착한 도윤의 집 근처 골목에 차를 주차한 차영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자신은 안전하게 도윤의 동네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제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갔을 한태주가 어떻게 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전화를 할까, 메시지를 보낼까 양단간에 고민을 하고 있다가 완전히 집에 들어간 뒤에 하는 편이 낫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가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도로 밀어 넣으려 하는 순간, 때마침 도윤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을 내려다보면서 힐끗 앞쪽의 주택을 살폈다. 늦은 시간인데도 거실에 불이 켜진 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땅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사를 전전할 때도 낮은 층만 고집했던 그인지라, 평범한 단층 전원주택이 참 좋아 보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차영이 전화를 받았다.
“응, 도윤아. 나 도착하긴 했는데.”
- 그래? 어딘지 정확히 모를 것 같아서 걸었다. 마중 나가?
“아냐. 골목 어귀야. 방금 주차했어. 너희 집도 보여. 거실 불 켜진 데 맞지?”
- 응, 맞아. 그럼 얼른 들어와! 현관 열어 놨어.
“그런데 진짜 들어가도 돼? 부모님은 뭐라셔? 네 남자 친구한테도 나 오늘 자고 가는 거 미리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가 심각하게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가려 하자 도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 야, 방 남아서 내준다는 건데 뭘 그렇게 몸을 사려. 집에 엄마 아빠도 계시고, 다 허락하셨고. 우리 사이에 성별 남녀라고 내외하면 그게 더 웃기지 않냐?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살짝 높아져 있었다. 먼저 도움을 요청한 차영 덕분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차영은 이런 데 인색했다. 신세 같은 건 웬만해선 안 지려 들었다. 곁을 주는 것 같아도 중요한 순간마다 칼같이 굴어서 도윤이 평소에 섭섭해한다는 건 이미 본인과 제 어머니를 통해 여러 번 듣고, 또 눈치도 채고 있던 터였다.
“뭐 먹을 거라도 사 갈까?”
- 치킨 시켜 먹자. 올라올 때 아이스크림만 사 와. 네가 찬 건 겨울에 먹는 게 최고라며. 너 지금 어디에 차 댔는지 모르겠는데 골목 끝에 편의점 있거든?
“아, 나 방금 들어오면서 봤어.”
- 거기에서 사면 돼. 난 방 청소해 놓고 있을게!
“알겠어.”
간단히 통화를 끝낸 차영은 이제야말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다가 안에서 만져지는 차 키를 괜히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태주가 여러 번 만졌던 물건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긴장한 기색으로 제 목을 두른 머플러까지 매만져 보던 차영은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걸었다.